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며느리 복이 없던 세종, 왜 4명을 쫓아냈을까?

며느리 복이 없던 세종, 왜 4명을 쫓아냈을까? 세종은 애민정신이 남달랐던 왕으로 백성을 사랑한 그 마음 때문에 지금까지 성군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렇게 어진 왕에게 며느리 복은 없었는데, 세종은 4명의 며느리를 쫓아낸 무정한 시아버지였다. 그렇다면 며느리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랬을까요? 1427년 4월 26일, 문무백관과 함께 예복을 입은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나타난다. 그날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왕세자 문종이 결혼하는 날, 세자빈을 맞이하러 가는 세자에게 덕담하기 위해 근정전에 나온 것... 그때까지 조선은 건국 이후 한 번도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받은 적이 없었는데, 세종에 와서유교 종법에 따른 정통성 있는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문종은 어린 시절부터 자..

팔레스타인, 누가 왜 가나안 땅을 그렇게 부르게 했을까?

팔레스타인, 누가 왜 가나안 땅을 그렇게 부르게 했을까? 3,000년 전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 땅을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블레셋인이 맞붙어 싸운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 땅에 세운 도시였는데,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판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죽음으로 몬 연인 델릴라는 당시 가자에 살던 블레셋 여인... 그리고 유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유대인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무릎을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사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000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기원전 4세기 그렇게 용맹했던 블레셋인은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 군대에 저항하다 패전한 후 역사에서 사라졌..

일성록, 왕의 일기에서 시작된 국정 기록.

일성록, 왕의 일기에서 시작된 국정 기록. 정조는 증자가 말한 매일 세 번 나를 반성한다는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에 감명을 받아 어려서부터 일기를 썼다. 이렇게 ‘일성록(日省錄)’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가 시작이었다. 이런 사실은 정조가 ’일성록‘ 편찬을 명하면서 증자의 글귀를 인용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1785년 정조는 자신이 태어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토대로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지시한다. 이 편찬 작업은 규장각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을 정리한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에서 따온 ‘일성록’으로 ..

프랑스와 독일에 여왕이 없었던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에 여왕이 없었던 이유는? 영국의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스페인의 이사벨,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등 중세와 근대 유럽 왕국에는 여왕이 재위했다. 이런 여왕 중에는 상당한 치적을 쌓은 여왕도 있었지만,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프랑스는 1천 년이 넘도록 여왕이 다스렸던 적이 없었고,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통합적인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의 경우 18세기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제로 즉위했으나 그것은 합스부르크 왕통이 끊어진 탓으로 결국 그로 인해 유럽 각국의 간섭을 받아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독일에 여왕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와 독일에만 여왕이 없었던 까닭은 게르만 전통을 따른 살리카 법전 때문... ‘살리카 법’은 고대 게르만의 부족법으..

조선 시대 무덤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해서 불렀을까?

조선 시대 무덤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해서 불렀을까? 성묘(省墓)라는 말은 ‘살필 성(省)과 무덤 묘(墓)’자로 조상의 무덤을 살핀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왜 산소에 대해 ‘무덤 묘(墓)’자를 쓰고 천마총, 무용총, 무령왕릉처럼 무덤마다 붙이는 명칭이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 시대에는 죽은 사람(死者)의 무덤을 ‘능(陵), 원(園), 묘(墓), 총(塚), 분(墳)’ 등 5가지로 구분해서 불렀다. 먼저 무덤 능(陵)’은 왕과 왕비(후비)의 무덤으로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 왕후 심 씨의 무덤이고 서울 성북구의 ‘정능(貞陵)’은 이방번, 이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 무덤이며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은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와 후비의 무..

[이스라엘 역사 3] 영국의 양다리 정책, 조상의 땅과 삶의 터전.

[이스라엘 역사 3] 영국의 양다리 정책, 조상의 땅과 삶의 터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자 1917년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한다. 그리고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대계 금융자산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을 빌리려고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한다. 그러나 2년 전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이용해서 아랍 지도자 후세인에게도 오스만제국과의 싸움에 참전하면 팔레스타인에 아랍국가를 세우게 해 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했다. 이름은 ‘선언’이지만 사실은 아랍과 유대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밀약을 했던 것... 같은 땅을 놓고 이중계약을 한 영국의 이런 조치는 지금..

[이스라엘 역사 2] 디아스포라, 그리고 이슬람 칼리프가 통치하는 땅.

[이스라엘 역사 2] 디아스포라, 그리고 이슬람 칼리프가 통치하는 땅. 기원전 37년,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고 제한이 없는 자치권을 주면서 헤롯은 로마 제국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된다. 헤롯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로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켜 마사다의 요새 등을 만든다. 또 그는 성전을 당시 가장 웅장하게 증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유대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사망했고, 그 후 유대는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 후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전투력이 우세한 로마가 승리하면서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제2성전이 무너지는데, 이때 남은 제2성전 서쪽 벽이 바로 통곡의 벽... 예루살렘 함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서서..

[이스라엘 역사 1]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일까?

[이스라엘 역사 1]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일까? 폭탄 테러, 보복,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반복,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예루살렘을 둘러싼 끝없는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목숨 건 땅 빼앗기를 종식하지 못하는 걸까? 현재 이스라엘 지역의 고대 이름은 가나안... 약 4천 년 전,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 조상 아브라함이 이곳에 정착한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에 엄청난 기근이 닥치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과 그의 12명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이집트 나일강 하류로 이주한다. 이집트의 노예가 된 유대인들이 400년간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모세가 유대인을 끌고 이집트를 탈출,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한다. 그들은 광야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