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온양 행궁, 조선 왕실의 최고 요양소.

온양 행궁, 조선 왕실의 최고 요양소. 조선 시대에는 왕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 행궁은 군사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도 있었고 정조가 아버지 무덤을 수원에 조성한 뒤 이곳을 자주 찾기 위해 지은 화성 행궁도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왕들이 가장 많이 찾은 행궁은 온양 행궁으로 바로 온천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 때부터 온천을 자주 찾은 기록이 나타나는데, 태조가 즐겨 찾은 온천은 황해도 평산으로 당시는 평주라 불렀다. 태조는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8월 21일 대간과 중방 그리고 사관 각 1명과 의흥 친군위 군대를 거느리고 평주 온천에 거둥한다. 1393년 4월에도 태조는 또 평주 온천에 다녀오는데, 하찮은 병으로 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와서 몸이 몹시..

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었을까?

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왕조의 중흥과 문화 중흥의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고 있는 정조 시대...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시대가 되기까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는데, 무엇보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의 불안한 위치 때문이었다. 일찍이 정치의 냉엄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정조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주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치적 역량을 모은다. 이를 위해 ‘탕평(蕩平)’과 ‘정학(正學)’의 이념을 왕의 입장에서 해석한 ‘성왕론(聖王論)’이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한다. 정조의 성왕론은 왕을 정치의 핵심 주체로 보는 것으로, 붕당(朋黨)이 공론 형성과 관련해서 원래의 기능을 상실, 각 당..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조선 시대에 편찬한 주요 책들은 편찬이 완료되면 왕에게 바쳤지만, 실록은 예외였다. 총재관이 완성 여부만 왕에게 보고한 후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다음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했던 것... 만약 왕의 열람을 허용할 경우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찬된 실록은 봉안 의식을 치른 후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실록을 보관했는데,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중종 때의 기록을 보면 관청의 노비들이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 사고에 화재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갈리아 전쟁, 병력이 많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갈리아 전쟁, 병력이 많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8년에 시작해서 기원전 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 간의 전쟁이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 국가들과 교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헬베티 족은 대서양 연안의 산토니 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 속주를 지나게 해달라고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의 영토로 강제 통과하려고 하자 하이두이 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을 기술한 부분에 다음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

왜 세종은 버터 생산을 중지시키려고 했을까?

왜 세종은 버터 생산을 중지시키려고 했을까?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병역은 국민의 의무다. 따라서 남성의 경우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면제를 받을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반드시 군대 가야 한다. 그런데 군대 생활이 힘들고 군 복무가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된다며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도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시대 초기에도 병역 기피자가 있었다고... 특히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방 지역의 버터를 만드는 곳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다. 유제품인 버터는 서양에서 전해진 식품... 우리 기술로 국내에서 처음 버터를 생산한 것은 1968년이고 버터 대용품 마가린은 1960년대부터 생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초기에 무슨 버터인가 하겠지만, 버터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

드미몽덴, 19세기 파리 사회의 독특했던 직업의 여성.

드미몽덴, 19세기 파리 사회의 독특했던 직업의 여성. 19세기 프랑스 파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드미몽덴(Demi-Mondaine)’이라고 부르던 독특한 직업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드미몽덴’은 ‘반(半) 사교계 여자’, 즉 고급 매춘부를 의미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생활 전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여성... 따라서 드미몽덴 중에는 배우인 경우도 있었고 무대에서 자신을 최고로 빛나게 하기 위해 왕후나 귀족, 부르주아 계급에게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특히 인기 있는 드미몽덴은 자신을 지지하고 열렬히 응원하는, 요즘의 아이돌 팬클럽같이 도움과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런 드미몽덴 중에 청순함으로 널리 알려진 여자가 있었는데, 알렉상드르 뒤마피스가 1848년에 발표한 연애 소설 ‘춘희..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는 왜 스스로 물러났을까?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는 왜 스스로 물러났을까? 2013년 2월 11일, 바티칸발 뉴스로 인해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는데,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화로 퇴위를 전격적으로 발표했기 때문... 가톨릭교회 법전 332조 2항을 보면 교황의 자진 퇴위는 원칙적으로 가능했지만, 신의 대리자로서 맡은 임무를 끝까지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관습적으로는 종신직으로 생각했다. 물론 2천여 년에 걸친 로마 가톨릭의 역사에서 드물지만, 교황이 강제로 퇴위당하거나 스스로 퇴위한 전례가 있었다. 기록상 처음 사임한 교황은 235년 폰티아노스... 심지어 교회의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는 2명 또는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재임했던 때도 있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즉위 당시에도 78세의 고령으로 10년 가까이 심장..

민주주의의 역사, 조세 저항의 역사다.

민주주의의 역사, 조세 저항의 역사다.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이나 되는 파리의 생선 장수 아줌마들이 베르사유궁전을 향해 행진한다. 억척스럽고 힘까지 좋은 아줌마들이 생선 다듬는 칼을 들고 20㎞나 행진한 이유는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말을 했다는 루머가 파리 시내에 퍼지자 소위 ‘꼭지’가 돌아버렸기 때문... 베르사유궁전을 둘러싼 이들은 여섯 명의 대표를 뽑아 루이 16세에게 면담을 요구하고 접견실로 왕이 들어오는 순간 이들 중 한 명이 충격과 감동으로 기절한다. 말로만 듣던 왕을 처음 보았는데, 루이 16세의 풍채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줌마들은 국민회의가 결의한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던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해서 결국, 파리로 돌아가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