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조선 시대 건축물은 몇 등급으로 구분했을까?

조선 시대 건축물은 몇 등급으로 구분했을까? 조선 시대에는 건축물마다 이름을 붙여 건물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조선 시대 건물은 규모에 따라 몇 등급으로 구분했고 어떤 이름을 붙였을까? 조선 시대에는 거처하는 사람의 신분과 집의 규모에 따라 궁궐(宮闕)부터 시작해서 작은 정자에 이르기까지 건물 크기를 8등급으로 나누어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으로 구분했다. 예를 들어 경복궁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은 임금(王)이 신하들과 조회하며 나랏일을 논하던 집무실이 있는 가장 큰 건물로 신하들이 왕에게 고(告)하는 ‘전하(殿下)’는 근정전(勤政殿) 아래에서 임금께 고(告)한다는 존칭어 외침이었다. TV 역사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폐하(陛下)’라는 말도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섬돌(陛)..

신증동국여지승람, 500년 전 조선 사회를 생생하게 담은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500년 전 조선 사회를 생생하게 담은 지리지. 조선 전기 지리지 편찬사업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완성으로 결실을 보았는데,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의 시문을 합한 형태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훈구파 세력들이 중심이 되었다가 김종직과 최부 등 사림파 세력이 편찬에 참여해서 ‘동국여지승람’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힘을 합쳐 간행한 지리지라는 점에 의미가 크다. 그 후 중종이 즉위하자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려 성종 이후에 변화된 사항들을 폭넓게 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이행, 윤은보, 홍언필 등이 중심이 되어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는데, 이 지리지는 55권 25책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전국 군현의 사회, 경제,..

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설이 퍼졌을까?

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설이 퍼졌을까? 1919년 1월 21일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68살의 나이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고종은 당시 한국인에게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45년간 재위해서 조선 역사상 3번째로 오래 왕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혁명에 이르는 여러 정치적 격변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등 한국 근대화의 전 과정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세창이나 이상설, 한용운처럼 고종의 밀사 역할을 했거나 고종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 등 고종이 과거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을 탄압한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 또는 국가 지도자로서 고종이 너무 무능하고 유약했다..

현종의 리더십, 예송 논쟁을 이념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현종의 리더십, 예송 논쟁을 이념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18살의 현종은 첫 정치 현안으로 ‘상복을 입는 기간’을 정해야 했는데, 이것이 ‘예송논쟁’(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시작이다. 기해예송은 자식인 효종의 죽음에 부모이자 효종의 새어머니 장렬왕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조정 중신들이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싸운 일이다. 이 논쟁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정치적 함의를 따져보면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가 장남 소현세자가 죽은 후 장손이자 소현세자의 장남이 아닌 차남, 즉 효종이 왕위를 잇게 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에서 패배 후 경직되고 보수화되어 가던 당시 조선에서 ‘장자 우선’이라는 유교 원칙을 무..

잡상(雜像), 벽사의 기능과 궁궐의 미학 기능.

잡상(雜像), 벽사의 기능과 궁궐의 미학 기능.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종묘 등 주요 시설물의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이라고 부르는 토우(土偶)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보통 규모가 큰 건축물이나 문루의 추녀마루에 잡상과 똑같은 기능을 하는 첨상구수(檐上九獸) 혹은 선인주수(仙人走獸)를 설치했다. 잡상은 보통 잡스러운 석수상이라는 개념으로 통용되지만, 여기에서 잡(雜)은 모으다 또는 전체라는 의미다. 따라서 잡상은 추녀마루의 여러 속성을 모두 일컫는 개념으로 잡(雜)은 갑골문에서 3마리의 새가 합해진 합자로 여기서 3은 여럿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국가 기록인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모두 추녀의 석수상을 잡상이라고 통칭하고 있는데, 잡상은 중국의 기록에는 보이지 ..

왜 왕릉 주변에는 갈비집이 많을까?

왜 왕릉 주변에는 갈빗집이 많을까? 조선 시대 왕릉의 주변을 둘러보면 왕릉의 이름을 붙인 홍릉갈비, 태릉갈비, 융건릉 갈비(수원갈비) 등 갈비집들이 자리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왕릉 주변에 갈빗집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조선 시대에는 평상시 소를 잡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해서 백성들은 평소에 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소가 농사를 돕는 큰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왕이 친히 행차해서 왕릉에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날은 소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왕실의 제사는 일반 제사와 달리 생고기를 올리는 것이 통례였는데, 소 생고기인 우성(牛腥)과 양 생고기인 양성(羊腥) 그리고 돼지 생고기인 시성(豕腥)의 각 부위를 몇 점씩 올렸다. 물론 나머지 고기를 삶는 별도의 솥(鼎)도 설치했..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그 배경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그 배경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 조를 보면 고구려 온달과 평강공주의 러브스토리가 나오는데, 온달은 평원왕의 사위이자 대형이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그리고 평원 왕이 죽고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찾겠다며 출정을 자원, 신라군과 아차산성에서 전투 중 전사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계급사회였던 당시, 바보와 공주의 결혼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정말 그랬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야기처럼 온달이 정말 동냥을 해서 어머니를 봉양할 만큼 가난한 바보 사내였다면 그는 결코, 공주와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온달이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면 그 결혼은 흔한 이야기이므로 기록으로 남길 만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조선 시대 역관은 어떻게 양성했을까?

조선 시대 역관은 어떻게 양성했을까? 조선 시대에도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과거시험 중 기술관을 뽑는 잡과에 역과를 두어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관을 선발했던 것... 또 당시에도 외국어 학습서가 있었는데,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비롯해서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 등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도 있었다. ‘통문관지’라는 책을 보면 유명했던 역대 역관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조선 시대 역관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로 요즘으로 치면 국가 외교관이나 공식 통역사다. 조선 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했는데, 이 기관은 조선 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사대교린이라는 조선의 기본 외교 방침에 적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