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이스라엘 역사 2] 디아스포라, 그리고 이슬람 칼리프가 통치하는 땅.

화별마 2023. 10. 17. 16:35

디아스포라 이미지

[이스라엘 역사 2] 디아스포라, 그리고 이슬람 칼리프가 통치하는 땅.


기원전 37,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고 제한이 없는 자치권을 주면서 헤롯은 로마 제국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된다헤롯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로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켜 마사다의 요새 등을 만든다.


또 그는 성전을 당시 가장 웅장하게 증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유대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사망했고, 그 후 유대는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 후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전투력이 우세한 로마가 승리하면서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제2성전이 무너지는데, 이때 남은 제2성전 서쪽 벽이 바로 통곡의 벽...

예루살렘 함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서서히 갈라지게 만들고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 유대 문화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디아스포라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약 2천 년 동안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이방인으로 떠돌며 온갖 차별을 받으면 살아간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대민족과 유대교의 정신은 그들의 종교법 할라카에 의해 하나로 결속된다.

 

이후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 비잔틴 제국이 등장하면서 기독교 중심 국가가 세워진다.


그리고 636년 무하마드가 사망한 후 4년이 지나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정복, 아랍 왕조의 지배가 4세기가 넘게 이어지고 칼리프들이 이 지역을 통치한다.

 

그러는 사이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버금가는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고 비 이슬람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심해지자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

 

그 후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200년 동안 로마의 교황이 예수가 부활한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이에 따라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모인 제1차 십자군이 1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곳에 살던 유대인을 대부분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이후 13세기까지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결국 이슬람군에 최종 패배하며 실패로 끝났으나, 유럽에서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통로가 열렸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일반화되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91년부터 이스라엘은 다시 무슬림의 지배를 받게 되고 무슬림 노예 군대인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이 세운 교회를 파괴하고 대신 이슬람 사원을 세우며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킨다.

 

1517년부터 이곳은 같은 이슬람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는데, 19세기가 되자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양 열강에 의해 이스라엘 땅은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가 된다.

 

1870년대에는 예루살렘 인구 과반수가 유대인으로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될 토대를 마련한다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으로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과 동의어로 사용해 온 시온에서 따온 이름...


그동안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늘 공동체의 주변에만 머물렀고 집단적인 희생양이 되곤 했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는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소문으로, 십자군 전쟁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이는 종교, 문화, 경제적인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중세 유럽의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땅을 향한 유대인들의 애착은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는 시온주의 사상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