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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복이 없던 세종, 왜 4명을 쫓아냈을까?

화별마 2023. 10. 25. 10:36

세종 초상화

며느리 복이 없던 세종, 4명을 쫓아냈을까?

 

세종은 애민정신이 남달랐던 왕으로 백성을 사랑한 그 마음 때문에 지금까지 성군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렇게 어진 왕에게 며느리 복은 없었는데, 세종은 4명의 며느리를 쫓아낸 무정한 시아버지였다. 그렇다면 며느리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랬을까요?

 

1427426, 문무백관과 함께 예복을 입은 세종이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나타난다. 그날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왕세자 문종이 결혼하는 날, 세자빈을 맞이하러 가는 세자에게 덕담하기 위해 근정전에 나온 것...

 

그때까지 조선은 건국 이후 한 번도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받은 적이 없었는데, 세종에 와서유교 종법에 따른 정통성 있는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문종은 어린 시절부터 자질과 능력이 탁월해서 7살에 세자가 된 후 29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으며 즉위를 준비했다.

 

40대의 세종은 병이 깊어지자 세자였던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문종은 즉위 후 강병을 위해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 아버지를 닮은 준비된 왕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무려 3년 동안 며느릿감을 골랐고 문종의 배필은 정3품 상호군, ‘김오문의 딸... 그녀는 문종과 결혼해서 휘빈이라는 호를 받는 휘빈 김 씨다..

 

하지만 휘빈 김 씨의 결혼 생활은 불과 2년여 만에 끝나는데, 세자가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 않았고 궁녀들을 가까이했다.

 

당시 문종은 14살로, 결혼하고도 합방은 하지 않는 상황으로 휘빈 김 씨는 문종이 15살이 되면 합방할 수 있으니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문종이 15살이 될 무렵 휘빈 김 씨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유교 예법에 따라 휘빈 김 씨는1년 동안 할아버지 상을 치르는 동안 합방할 수 없었다.

 

초조했던 휘빈 김씨는 양반가 첩의 딸 호초라는 궁녀에게 은밀하게 도움을 청했고 호초는 해로운 기운을 제압하여 재앙을 없애고 흉함을 길함으로 바꾸는 압승술(壓勝術)’을 알려준다.

 

휘빈 김씨는 문종이 좋아하는 궁녀의 기를 눌러 사랑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세자빈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손을 댄 것...

 

결국, 비술을 시도한 며느리 휘빈 김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친정으로 보냈고, 세자빈에게 비술을 가르친 궁녀 호초는 참형을 당한다.

 

세종이 신중하게 고른 2번째 며느리는 경남 창녕 현의 원님이던 봉여의 딸로 순빈 봉 씨... 그런데 순빈 봉 씨는 더 충격적인 일을 벌이는데, 궁궐에 술을 숨겨두고 틈날 때마다 마시면서 취한 채로 돌아다닌 것...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실록에도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순빈 봉씨는 자신의 아버지 3년 상을 치르는 상황에서도 100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술을 마셨던 것... 또 동성애를 하다가 발각이 되기도 했고 가짜 임신 소동까지 벌이고 만다결국, 143610, 문종이 재혼한 지 7년 만에 세종은 다시 며느리를 쫓아낸다.

 

그뿐만이 아니고 세종의 적자 임영대군과 영응대군의 아내들 또한 세종에 의해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임영대군은 개국공신 남재의 증손녀인 남 씨와 혼인하지만, 부인이 12살이 넘었는데도 밤에 오줌을 싸고, 눈동자가 바르지 못하며, 혀가 짧고 정신이 이상하다며 2년 후 이혼시킨다.

 

또 세종은 영응대군이 11살이 되던 해, 직접 간택을 하는데, 고려 시대부터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유서 깊은 집안의 송 씨라는 여인이었다그렇게 직접 공을 들여 뽑았는데도 세종의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이번에도 병이 있다며 5년 만에 며느리를 쫓아낸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영응대군은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첫 번째 아내인 송 씨와 재결합하는데, 아내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임영대군의 전 부인 남 씨는 70대까지 장수했고, 영응대군의 부인 송 씨 역시 나중에 딸을 둘이나 낳았다.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돌보았던 세종은 왜 유독 며느리에게 매몰찼을까?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왕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세종은 국가와 집안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유교적 이상에 딱 맞기를 원했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말처럼 세종은 임금이 모든 정사를 보살피는 피는 그런 왕이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