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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3] 영국의 양다리 정책, 조상의 땅과 삶의 터전.

화별마 2023. 10. 17. 16:40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미지

[이스라엘 역사 3] 영국의 양다리 정책, 조상의 땅과 삶의 터전.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자 1917년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한다.

 

그리고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대계 금융자산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을 빌리려고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한다.

 

그러나 2년 전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이용해서 아랍 지도자 후세인에게도 오스만제국과의 싸움에 참전하면 팔레스타인에 아랍국가를 세우게 해 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했다. 이름은 선언이지만 사실은 아랍과 유대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밀약을 했던 것...

 

같은 땅을 놓고 이중계약을 한 영국의 이런 조치는 지금까지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시오니즘 운동에 불을 붙였고,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대량 이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졌다.

 

반면 이곳에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은 추방되거나 요르단 등지로 피신해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계획인 홀로코스트를 치밀하게 수행,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이 급발진한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노력하지만,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겨버린다.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쪼개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하는 제안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아랍인들은 거부한다.

 

그 이유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이 가진 땅은 전체의 6%였는데, 분할하게 되면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56%나 차지하게 되어 아랍인 입장에서는 너무 불평등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유엔의 투표 이후,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규정된 지역에서 떠나지 않고 싸웠고, 이스라엘은 아랍권의 반대에 맞서 텔아비브에서 건국을 선포한다.

 

이로써 2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 70만 명은 쫓겨났지만,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2천 년의 유랑 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의 입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이슬람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유대교와 기독교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한 다음 날, 아랍국가들이 연합,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어 총 4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4차례의 전쟁에서 미국의 최신 무기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승리를 이어가고 1980년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하고 대부분의 정부기 관도 예루살렘에 설치한다.

 

물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주장을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 수도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각 나라에서도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둔다.

 

유엔은 예루살렘의 특수하고 예민한 성격을 고려해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제특별관리지역으로 하자는 결의를 내놓지만, 아랍인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해서 싸운다.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상을 맺지만, 또다시 유혈 충돌, 휴전 협상, 암살, 자살, 테러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2018년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자 다시 유혈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2천 년 만에 조상과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는 이스라엘과 삶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팔레스타인... 영국의 양다리 정책으로 발생한 이 두 나라의 뿌리 깊은 갈등을 푸는 해법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