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합스부르크 가문 (2), 누가 이 가문을 역사의 무대로 올려놓았을까?

합스부르크 가문 (2), 누가 이 가문을 역사의 무대로 올려놓았을까? 루돌프 1세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지는데, 이 보헤미아 왕은 오스트리아 영주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몇 년째 빈을 점령한 채, 루돌프 1세가 반환을 요구해도 무시한다. 힘이 없는 신성로마 황제에게 당당히 반기를 든 것... 이제는 실력 행사밖에 방법이 없었다. 루돌프 1세의 결의에 선제후들도 찬성했지만, 그들은 입으로만 응원할 뿐 손을 빌려주지는 않은 채 강 건너 불구경만 한다. 그들은 루돌프 1세의 실력을 지켜보다가 둘이 함께 망해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가장 좋은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마침내 대관식 후 5년이 지난 1278년, 빈 북동쪽의 마르히펠트에서 이름뿐인 황제가 이끄는 빈약한 군..

합스부르크 가문 (1),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합스부르크 가문 (1),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중부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 유럽의 역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 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인 자신들의 고귀한 푸른 피를 자랑스러워했고 다섯 종교와 12 민족을 수 세기에 걸쳐 통치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사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권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포르투갈, 브라질, 멕시코, 캘리포니..

스페인, 어떤 역사를 가진 나라일까?

스페인, 어떤 역사를 가진 나라일까? 올해 칠순을 맞이한 나를 위해 두 딸이 아름다운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 티켓을 선물했고 두 사위는 여행하는 동안 쓰라며 적지 않은 경비를 건네주어 편안하게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한 이베리아반도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에워싸인 사람 주먹처럼 생긴 땅덩어리로 피레네산맥이 동서로 가로놓여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반도 남쪽에는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살짝 뚫려 두 개의 대륙을 영원히 갈라지게 만든 지브롤터 해협이 있다. ‘지브롤터(Gibraltar)’라는 말은 ‘타리크의 산’이란 뜻으로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을 이끌고 이베리아반도에 침입했던 타리크(Tarik) 장군과 ‘산’이라는 의미의 ‘지브르(Gibr)’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고려 무신정권, 최 씨 일가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이유?

고려 무신정권, 최 씨 일가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이유? 고려시대 무신정권은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 최충헌(崔忠獻) 일가로 이어지면서 100년 동안 무신정권 시대를 연다. 그중에서도 최 씨 정권이 4대 62년 동안 장기 집권했는데, 쿠데타는 쿠데타를 낳는다는 정치의 격언처럼 정중부는 아들 정균(鄭筠)과 함께 이의방과 이고를 제거하고 시중 벼슬에 오르지만, 9년 후 26살의 청년 장수 경대승에게 살해된다. 하지만 경대승이 4년 만에 병사하자 경주 천민 출신 이의민이 12년간 정권을 잡았으나 명종 26년에 장군 최충헌에게 살해되면서 최 씨 일가의 장기 집권 시대가 열린다. 그렇다면 최 씨 무신 정치의 서막을 장식한 최충헌은 누구일까? 최충헌은 우봉 사람으로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

정중부의 난,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정중부의 난,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사회로 법제적으론 문반과 무반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양반사회였으나 우문정책(右文政策)으로 숭문경무(崇文經武) 풍조가 만연해서 언젠가는 폭발할 갈등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문신 귀족은 정치권력을 전부 독점하고 심지어는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해서 무신은 문신 귀족의 호위병으로 전락한 상태... 1170년 고려 의종 24년 8월 국왕 일행이 화평재(和平齋)에서 연회를 베풀고 문신들을 불러 함께 놀았는데, 당시 호위하던 군사들은 굶주린 상태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은밀하게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거사를 요청하는데, 왕과 시를 지으며 놀고 있는 문관들 중에는 26년 전 나례(儺禮) 의식 때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린 김부식의 ..

조선시대 처녀성 판별, 성종은 어떻게 판결했을까?

조선시대 처녀성 판별, 성종은 어떻게 판결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9대 국왕 성종(成宗)이 처녀성을 판별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관료가 사대부가의 처녀를 후처로 맞이했는데, 혼인한 지 사흘 만에 왕에게 이혼소장을 올렸다. 내용은 처녀를 실행(失行)했으니 이혼하고자 한다는 것...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혼이 있는 곳에는 이혼이 있게 마련이고, 조선시대에는 처에게 일곱 가지 잘못이 있을 때 쫓아낼 수 있는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이혼이 행해졌다. 그리고 이혼하려면 양반은 왕에게, 평민은 고을 수령에게 소청하고 그러면 필요에 따라 임시 재판이 열렸는데 재판은 왕이나 수령이 담당했다. 그런데 칠거의 적용이 매우 애매해서 최소한 여성을 보호하려고 삼불거(三不去)를 두었다. 즉 처가 쫓겨나면 돌아..

음서제도, 언제 처음 등장했고 혜택은 무엇?

음서제도, 언제 처음 등장했고 혜택은 무엇? 고려시대 광종 9년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과거제가 우리 역사상 처음 도입된다. 그러나 고려사회 역시 능력 본위 관료제 사회라기보다 신분 본위의 문벌귀족사회였기에 성종 때에는 무시험으로 등용하는 음서제도(蔭敍制度)가 등장한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음서 조에 의하면 음서를 크게 문음(門蔭)과 공음(功蔭)으로 구분했는데,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음서가 ‘문음’이었고, 공신 자손이나 특별한 공훈을 세운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을 ‘공음’이었다. 이를 통해 왕족 후예나 종신, 공신 후손, 5품 이상의 고관 자손 등을 대상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조기 진출할 수 있도록 특혜를 준다. 음서는 정기적 그리고 항..

프랑스혁명, 왜 술집 주인들이 시민들을 선동했을까?

프랑스혁명, 왜 술집 주인들이 시민들을 선동했을까?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처럼 리더십이 없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등과 같이 크고 작은 전쟁으로 빚을 진 것은 물론 대부분의 국외 식민지까지 상실한다. 1753년 당시 프랑스 국가 부채는 무려 13억 6천만 루블, 현재 가치로 약 3,240억 달러였고 7년 전쟁이 끝난 이후인 1764년에는 부채가 23억 5천만 루블, 현재 가치로 약 6,000억 달러에 달하게 된다. 결국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이자를 감당해야 했는데, 루이 16세에 이르러서는 정부 수입의 43%를 이자로 지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해서 프랑스 경제를 파탄 직전까지 내몰았고 설상가상으로 대흉년이 일어나 국민들이 끼니를 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