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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제도, 언제 처음 등장했고 혜택은 무엇?

화별마 2023. 12. 4. 10:15

음서제도 이미지

음서제도, 언제 처음 등장했고 혜택은 무엇?

 

고려시대 광종 9년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과거제가 우리 역사상 처음 도입된다그러나 고려사회 역시 능력 본위 관료제 사회라기보다 신분 본위의 문벌귀족사회였기에 성종 때에는 무시험으로 등용하는 음서제도(蔭敍制度)가 등장한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음서 조에 의하면 음서를 크게 문음(門蔭)과 공음(功蔭)으로 구분했는데,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음서가 문음이었고, 공신 자손이나 특별한 공훈을 세운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을 공음이었다.

 

이를 통해 왕족 후예나 종신, 공신 후손, 5품 이상의 고관 자손 등을 대상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조기 진출할 수 있도록 특혜를 준다.

음서는 정기적 그리고 항례적으로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 즉위, 책봉, 쾌차, 국가 경사 등이 있을 때도 부정기적으로 시행,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카르텔이 더 공고해진다.

 

음서의 수혜 범위는 당해 년에 11자를 원칙이었으나 탁음자(托蔭者)3품 이상일 때는 그 수음자(受蔭者)가 자(), (), 수양자, 사위, 외손, 동생, (), () 8개 친족까지 확대했다.

 

물론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간 경우 문한직, 학관직, 지공거직(과거 출제위원) 등 학술 관련 직책에는 취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음서는 공개 채용이 아닌 특별 채용으로 실제 근무하는 실직(實職)이 아닌 직임이 없는 산직(散職)인 동정 직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관직 임명에 법적 제한을 받는 한직제(限職制)는 적용받지 않아 관직에 조기 진출해 재상까지 출세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 셈...

 

고려사에 따르면 모든 음서 출신자는 18세 이상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통계를 살펴보면 과거로 초직(初職)에 진출한 이들의 평균연령이 24세 전후였다는 것과 비교해 음서의 경우는 15세 전후였다.

 

이렇게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인물 중 나이가 가장 적었던 자와 가장 많았던 자를 고려사와 현전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이가 가장 적었던 인물은 고려시대 납비(納妃)를 해서 공과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인 벌열의 경원(인주) 이 씨 문중 이식(李軾)으로 5살에 호부서령사(戶部書令史)가 되었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증조부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은 세 딸을 문종비로 바쳤고, 조부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정()은 한 딸을 선종 비로 바쳤고 아버지 이자효(李資孝)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었다.

 

또 집안인 이자겸(李資謙)은 한 딸은 예종비로, 두 딸은 인종비로 납비해서 왕실 부자(父子)와 겹사돈이 되었는데, 인종 때 스스로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의 도참설로 왕위를 노린 역모의 주인공이 된다.

가장 나이 많은 인물로는 수원 최 씨 문중의 최정(崔精)으로 그의 묘지명을 보면 어려서 유생이 되었으나 예종 3년에 33살의 늦깎이로 외고조부인 삼한공신(三韓功臣·고려 개국공신) 대상(大相) 김칠(金柒)의 문음으로 서리(胥吏)가 된다.

 

그리고 후일 현과(賢科·과거)에 급제해서 여러 관직을 거쳐 봉선고(奉先庫·왕실 제수품 담당) 부사(副使)로 봉직하다가 82세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관료 체제를 구축하면서 실력 위주의 개방사회가 되자 음서는 과거제에 밀려 특혜가 많이 축소된다.

 

5품에서 2품 이상의 고관 자손으로 범위가 제한되었고 음서 혜택을 받은 경우에도 문음취재에 합격해야 서리직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