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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1),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화별마 2023. 12. 21. 11:27

합스부르크 가문 문장 이미지

합스부르크 가문 (1),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중부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 유럽의 역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 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인 자신들의 고귀한 푸른 피를 자랑스러워했고 다섯 종교와 12 민족을 수 세기에 걸쳐 통치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사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권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포르투갈, 브라질, 멕시코, 캘리포니아, 인도네시아까지 미쳤다.

 

또 한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의 군주를 겸한 사례도 합스부르크 가문이었고 카를 5세의 경우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가지 이상의 직함을 가졌는데, 프란츠 요제프가 대관식을 올린 19세기 중반, 제국 말기였을 때도 영지 면적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최대였다.

 

이렇게 강대했던 이 가문의 기원은 의외로 오스트리아도 독일도 아닌, 10세기말 스위스 북동부의 시골에서 등장한 약소 호족에서 시작된다.

 

그 약소 호족으로부터 3대가 지난 11세기 초,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가 세워졌는데, 하비히트(Habicht)사냥매’, 부르크(Burg)요새’, 혹은 성채라는 의미로 여기에서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12세기가 되자 이 성을 본거지로 삼은 후손이 합스부르크 백작이라고 스스로 칭하는데, 이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흩어져 있긴 했어도 바젤 지역을 포함해 서 라인강 상류 일대를 중심으로 제법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13세기 초, 가난한 시골 호족이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되는 커다란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였다.

 

그렇다면 신성로마제국은 무엇일까? ‘제국은 복수의 민족과 국가를 통합한 군주국을 말하며, ‘신성은 쉽게 말해서 로마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며 가톨릭의 맹주라는 것을 보증했다는 뜻이다.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이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 포함한 독일국이 자동으로 로마 교황의 승인하에 황제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13세기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군웅할거 상태로 제후들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좀처럼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룰 수가 없었다.

 

힘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황제가 나타나지 않아서 독일의 왕, 즉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는 세습이 아닌 유력 제후 7(선제후)에 의한 선거로 결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초기 신성로마제국은 명목상의 호칭이었을 뿐 황제가 되어도 영토가 늘어나거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해도 가톨릭의 권위와 고대 로마제국의 계승을 결합한 상징적 호칭에는 절대적인 심리적 위엄과 권위가 따라왔다.

 

부와 권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유럽 최고의 지위인 만큼 이보다 더한 명예는 없었기에 황제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7명의 선제후는 누군가 뛰어난 인물 한 명이 나타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독일 왕 선정을 계속해서 미룬다.

 

로마 교황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이나 황제 자리를 비워둔 채 방치해서 ‘대공위(大空位)시대’가 된다.

 

결국 교황이 기다리다 지쳐 직접 황제를 지명하려고 하자 선제후들은 어쩔 수 없이 인선을 시작, 최대한 무능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르는데, 그렇게 선택된 인물이 바로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였다.

 

선제후들에게 루돌프는 안성맞춤의 인물로 가진 것도 알프스의 빈약한 영토밖에 없는 데 나이도 55세로 많았고, 재산도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일으킬 능력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또 황제라는 타이틀만 주면 무급 명예직이라도 좋다며 충성을 하고 일이 잘못되어도 다른 제후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그 누구도 루돌프의 야심과 저력을 깨닫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머지않아 루돌프의 야심을 알게 된다.

 

물론 당시 선제후들이 절대 황제로 만들지 않으려던 인물이자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루돌프의 대관에 이의를 제기한다.

 

교황이 그 부분을 선제후들에게 추궁하자, 그들은 루돌프의 가톨릭 신앙이 매우 깊다며 그를 옹호했고 바젤 대주교와 한창 교전을 벌이던 루돌프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위해 바젤 대주교와 즉시 강화를 맺고 대관식을 치르러 간다.

 

마침내 시골 백작은 신성로마 황제 루돌프 1세로 변신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상치 못한 행운을 잡아 힘들게 첫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