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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2), 누가 이 가문을 역사의 무대로 올려놓았을까?

화별마 2023. 12. 21. 11:32

합스부르크 가문 문장 이미지

합스부르크 가문 (2), 누가 이 가문을 역사의 무대로 올려놓았을까?

 

루돌프 1세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지는데, 이 보헤미아 왕은 오스트리아 영주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몇 년째 빈을 점령한 채, 루돌프 1세가 반환을 요구해도 무시한다.

 

힘이 없는 신성로마 황제에게 당당히 반기를 든 것... 이제는 실력 행사밖에 방법이 없었다루돌프 1세의 결의에 선제후들도 찬성했지만, 그들은 입으로만 응원할 뿐 손을 빌려주지는 않은 채 강 건너 불구경만 한다.

 

그들은 루돌프 1세의 실력을 지켜보다가 둘이 함께 망해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가장 좋은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마침내 대관식 후 5년이 지난 1278, 빈 북동쪽의 마르히펠트에서 이름뿐인 황제가 이끄는 빈약한 군대와 재정이 풍족한 명문가의 왕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가 격돌한다.

 

모두 루돌프 1세가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늙은 루돌프 1세는 한심하게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한다.

 

자칫하면 선제후들의 예상대로 될 뻔한 순간이었지만, 왕조를 지켜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경계에 선 그는 죽기 살기로 다시 말에 기어올랐고, 싸움은 갈수록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진다.

 

결국 루돌프 1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신앙심이 깊은 그에게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적의 허를 찌른 기습 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쟁의 형태는 기사 간의 양식을 지키는 전투였지만, 루돌프 1세는 그렇게 하면 반드시 진다는 사실을 알고 50~60기의 복병을 준비한 다음 적이 방심한 틈을 노려 갑작스럽게 측면공격을 했다.

 

이 전법은 기사 간의 양식을 저버리고 그저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방법으로 허를 찔린 오타카르 왕은 전사하고 적은 완전히 무너진다무능한 시골 노인이라고 루돌프 1세를 얕보았던 선제후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보고 틀림없이 초조했을 것이다.

 

루돌프 1세는 이 전투로 보헤미아를 손안에 넣고 이어서 오스트리아 일대도 자신의 영지로 삼았으며 스위스 산속에서 오스트리아로 무대를 옮긴다.

 

그 후 루돌프 1세는 이탈리아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고 오로지 합스부르크 왕조를 넓혀나가고 지키는 것만을 첫째 목표로 삼았으며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할 수 있도록 남은 10년의 인생을 모두 쏟아부어 싸운다.

 

루돌프 1세라는 파격적인 인물이 없었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알프스 지방의 일개 영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지만 루돌프 1세의 나이와 입장을 생각해 보면 합스부르크 왕조의 성립 과정은 특히 기적으로 느껴지며 루돌프 1세 덕분에 650년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루돌프 1세의 고군분투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대해진다.

 

그러나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순조롭게 세습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선제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경계하기 시작, 루돌프 1세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며 일치단결한다.

 

그렇게 해서 황제의 자리는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그 아들이 곧바로 탈환하고, 그로 인해서 암살당하고, 그러다 또 다른 가문에게 빼앗기고, 이번에는 손자가 되찾고,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증손자가 다시금 탈환에 나선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듭하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까지 무려 150년의 세월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