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안국동 일대, 이곳이 명당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안국동 일대, 이곳이 명당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경복궁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 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를 외우고, 새로 짓는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으로 할 것을 주청 했다고... 그렇다면 한양 천도를 하면서 궁궐의 터를 현 위치에 자리 잡은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읍지를 정하는 전통적인 풍수의 조건을 면밀히 검토,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적인 도읍지의 풍수 조건을 보면 첫째, 사방에서 산이 받쳐주어야 한다. 사방이라 하면 지관이 방위를 볼 때 사용하는 도구인 패철 상에 나타난 건(乾)·곤(坤)·간(艮)·손(巽)..

‘기(奇) 고(高) 박(朴)’, 수백 년간 광주 일대의 유명한 가문.

‘기(奇) 고(高) 박(朴)’, 수백 년간 광주 일대의 유명한 가문. 전남, 광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성씨(姓氏)를 손꼽을 때 하는 표현 중에 ‘기(奇), 고(高), 박(朴)’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광주 일대라고 말하면 광주를 포함해서 나주, 장성, 창평(남평, 담양, 화순, 동복)을 아우르는데, 현재도 이곳에서는 ‘기(奇), 고(高), 박(朴)’ 세 성씨를 명문가로 생각한다는 것....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이 세 성씨보다 급이 떨어지는 집안에서 이들과 혼사를 맺으려 노력을 기울였고, 어렵게 혼사가 성공하면 주위 사람들은 ‘택(턱)걸이 혼사’라고 부르며 부러워했다고... 이렇게 수백 년간 명문가로 인정을 받아 온 ‘기(奇), 고(高), 박(朴)’ 집안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 ..

병자호란, 조선 백성 6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간 전쟁.

병자호란, 조선 백성 6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간 전쟁. 2007년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과 백성이 47일 동안 겪었던 고초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냈다. 정묘호란이 발발한 후, 정확히 9년이 지나 발발한 병자호란... 정묘호란은 1627년에,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났는데, 9년 전에 조선이 후금에 치욕적으로 무릎을 꿇었다면, 이후 9년 동안 조선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철저한 대비와 준비를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청의 선발부대인 마부대 장군과 그의 부하 6,000명이 압록강을 넘고 의주를 거쳐 평양, 그리고 한양 근교의 홍제원 부근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의 군대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제원에 진을 치고..

승정원일기, 녹화 장면을 보는 듯한 현장 기록.

승정원일기, 녹화 장면을 보는 듯한 현장 기록. 흔히 조선 시대 최고의 기록문화로 ‘조선왕조실록’을 꼽지만, ‘승정원일기’와 비교하면 조선왕조실록은 요약본에 불과하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본 분량은 400여 권이 될 만큼 방대하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보다 무려 분량이 5배가 넘는다. 현재 3245책이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를 실록처럼 한글 번역본으로 출간하면 2,000권은 될 듯... 조선을 제외하고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승정원일기의 가장 큰 장점은 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실록이 임금이 죽고 난 후, 기록을 재가공하고 재편집한 것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임금을 따라다니며 그때그때의 현장을 기록한 것이다. 또 담긴 내..

중국 청나라, 무식한 소수가 유식한 다수를 지배했다.

중국 청나라, 무식한 소수가 유식한 다수를 지배했다. 중국 청나라는 30만 명의 만주족이 1억 5,000만 명의 한인을 지배한 정복국가로 출발했다. 또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나라... 이런 평화와 번영은 1670년대 1억 5,000만이었던 인구를 1850년대에는 4억 3,000만으로 증가시켰고, 몽골과 투르키스탄 그리고 티베트까지 정벌, 역대 왕조보다 광활한 영토를 구축했다. 아울러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를 지금의 중국에 유산으로 물려준 영토와 민족 구성 등의 측면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완성한 왕조가 바로 청나라... 그렇다면 청나라가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로서 다수의 한인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치제도와 사회질서를 ..

중국 조나라 무령왕, 호복(胡服) 때문에 죽었다.

중국 조나라 무령왕, 호복(胡服) 때문에 죽었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 쓴 ‘몽골의 초원’이라는 책을 보면 ‘양복’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옛날 북방 흉노족의 복장인 호복(胡服)은 좁고 둥근 모양의 소매에 긴 바지를 입었고 무릎까지 오는 가죽 구두를 신었는데, 그런 차림이 지금 양복의 시원이라는 것... 그는 또 기원전 4세기 중국 전국시대에 호복(胡服) 혁명을 일으키다 죽은 조나라 무령왕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호복(胡服)으로 인해 죽은 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조나라의 가장 큰 걱정은 유목국가인 흉노와 마주 보고 있어 언제 싸움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현실적 고민을 하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맹자가 말하는 유교는 문명주의를 표방해서 너무 비현실..

보석의 역사, 유대인 추방으로 시작되었다.

보석의 역사, 유대인 추방으로 시작되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마지막 이슬람인들을 몰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1492년,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은 그해 3월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한다. 전쟁으로 이반 된 민심을 다독이고 바닥이 난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유대인의 재산몰수와 콜럼버스의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그 배경이었다. 당시 스페인 국민의 6.5%가 유대인...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살았던 세파르드 유대인은 전 세계 유대인의 절반을 차지했고, 특히 수도 톨레도는 경제와 문화를 모두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상업 도시 바르셀로나는 유대 상인들이 상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스페인 왕국의 재정 고문을 지낸 아이삭..

왜 이름을 두고 '호(號)'를 썼을까?

왜 이름을 두고 '호(號)'를 썼을까?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옛 인물의 이름 앞에 붙는 여유당(與猶堂), 완당(阮堂), 고송(孤松) 같은 '호(號)' 또는 '별호(別號)'를 볼 수 있다. '호(號)' 또는 '별호(別號)'는 본명을 대신해서 허물없이 부르려고 혹은 본명을 쓰고 부르는 것이 예의 없다는 의미로 지은 일종의 별명이라고... 이런 '호(號)' 또는 '별호(別號)'에는 당시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조상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고 '이름' 대신 편하게 사용했다. 이렇게 옛 선비들은 '호(號)' 또는 '별호(別號)’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책이나 편지 등 각종 문서 작업할 때나, 다른 사람들과 풍류를 즐기며 인간관계를 맺을 때면 이름 대신 부르거나 사용한 것... 그렇다면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