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왜 이름을 두고 '호(號)'를 썼을까?

화별마 2023. 7. 14. 16:15

호라는 한자

왜 이름을 두고 '()'를 썼을까?

 

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옛 인물의 이름 앞에 붙는 여유당(與猶堂), 완당(阮堂), 고송(孤松) 같은 '()' 또는 '별호(別號)'를 볼 수 있다. '()' 또는 '별호(別號)'는 본명을 대신해서 허물없이 부르려고 혹은 본명을 쓰고 부르는 것이 예의 없다는 의미로 지은 일종의 별명이라고...

 

이런 '()' 또는 '별호(別號)'에는 당시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조상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고 '이름' 대신 편하게 사용했다.

 

이렇게 옛 선비들은 '()' 또는 '별호(別號)’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책이나 편지 등 각종 문서 작업할 때나, 다른 사람들과 풍류를 즐기며 인간관계를 맺을 때면 이름 대신 부르거나 사용한 것...

 

그렇다면 '()' 또는 '별호(別號)'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 또는 '별호(別號)'는 지식층이 뚜렷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고려 시대 중기 이후부터 시류처럼 부르고 썼다고 한다. 이어 조선 시대에도 대부분의 관료와 문인들 사이에 호를 갖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왜 이름을 놔두고 굳이 '()' 또는 '별호(別號)'를 썼을까? 그 이유는 바로 '피휘(避諱) 관습' 때문이었다고...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는 이름을 지을 때 왕이나 현인(賢人), 조상과 상관의 함자를 피해서 짓는 것이 예의였다.

 

이 같은 관습이 확대되면서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부모가 지어주거나 또는 임금이 내려주기도 하는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본 것... 그래서 각자의 본명 대신 편하게 부르고 쓸 수 있는 호를 갖기 시작했다고...

 

보통 '()' 또는 '별호(別號)'는 스스로 짓거나 스승 등 웃어른에게서 내려주셨는데,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나, 가지고 있는 것부터, 자연과 지향점 그리고 이상향까지 다양한 소재를 '()' 또는 '별호(別號)'에 적용했다.

 

조선 후기 서화가이자 실학자였던 김정희는 추사 외에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당시 교류했던 중국 청나라 학자 완원의 실사구시 학풍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담은 호다.

 

또 일반적으로는 서재나 거처의 명칭을 호로 쓴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실(), (), (), (), ()이라는 글자를 썼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경우, 선왕에게 하사한 '비해당(匪懈堂)'이라는 호를 딴 별장을 서울 인왕산 계곡에 짓고 문사들과 풍류를 즐겼다.

 

그 밖에도 무신이나 승려 그리고 국왕도 자신의 포부를 새겨 호를 지었는데, 청나라와 맞서 싸웠던 임경업 장군은 고고한 소나무의 절개를 닮겠다는 의미로 '고송(孤松)'이라는 호를,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싸웠던 사명대사 유정의 호 '사명당(四溟堂)'은 사해(四海), 그러니까 천하를 물과 구름처럼 돌아다니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런가 하면 지조 높은 매화와 대나무를 곁에 둔 곳이라는 '매죽헌(梅竹軒)'이라는 호는 사육신 성삼문의 호다.

 

보편적으로 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이후에는 보다 를 썼는데, 이름난 선비일수록 여러 개의 호를 썼지요.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경우, 자는 귀농(歸農)’ ‘미용(美庸)’이었고, 호는 다산’ ‘여유당(與猶堂)’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이었다.

 

내가 32년을 재직하고 직장에서 은퇴했을 때, 부총장을 지내셨던 우영(又英) 선생님께서 고향의 소나무처럼 살라며 지송(砥松)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