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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조선 백성 6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간 전쟁.

화별마 2023. 7. 18. 09:18


병자호란 이미지

병자호란, 조선 백성 6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간 전쟁.

 
2007년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과 백성이 47일 동안 겪었던 고초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냈다.
 
정묘호란이 발발한 후, 정확히 9년이 지나 발발한 병자호란... 정묘호란은 1627년에,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났는데, 9년 전에 조선이 후금에 치욕적으로 무릎을 꿇었다면, 이후 9년 동안 조선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철저한 대비와 준비를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청의 선발부대인 마부대 장군과 그의 부하 6,000명이 압록강을 넘고 의주를 거쳐 평양, 그리고 한양 근교의 홍제원 부근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의 군대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제원에 진을 치고 있던 마부대의 군사들이 보급부대도 없이 조선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도 그들과 싸움 한 번 변변히 하지 못한 채, 협상을 벌이면서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아까운 시간만 허비한 셈...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한 이 청나라군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도대체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엇을 준비했고, 어떻게 대비했는지 한탄과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당시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대비책으로 수도 근위부대인 어영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호위청 부대에 각각 1만 명씩 배치하면서 수도권 방어군인 총융청을 창설했다.
 
하지만 조선의 군대는 실전 경험도 없고, 장수들조차 전쟁에 대한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또 적이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사명감도 없었고, 장수라는 직책도 명예직으로 생각, 싸움이 벌어지면 적당한 명분을 둘러대고 자리를 피했다.
 
한심하게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인조의 몰골은 또 어떠한가?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직접 말고삐를 잡고 인조의 대가를 끌고 올 정도였다.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강은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신하나 백성이나 전쟁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
 
적에게 포위당한 임금을 구하기 위해 부대가 몰려오리라는 간절한 기대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인조의 모습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도자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더 놀라운 사실은, 봉림대군과 그 일행이 어렵게 강화도로 피신했을 때, 나라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 틈을 이용해 청군은 단 몇 척의 배를 가지고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봉림대군이 이런 비상시국에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며 책망하자, 김경징은 전장에서 장수는 임금의 말도 거스르는 법이라며 정신줄을 아예 놓고 있었다.
 
결국, 힘없는 조선 백성은 포로가 되어 노예처럼 청나라로 끌려갔는데, 그 수가 무려 약 60만 명...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많은 백성들이 끌려간 것...
 
청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인구를 늘리는 것... 이미 정묘호란 때 5,000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간 후금은 조선의 여인들이 아이를 잘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조선으로 대규모 노예사냥을 나선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누구는 그렇게 준비도, 대비도 못 한 것이 빗물에만 의지해서 농사를 짓는 문화가 지배했기 때문에 준비보다는 요행에 의지했다는 말을 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물론 시대가 달라져서 노예로 잡혀갈 일은 없겠지만, 국력이 쇠퇴하고 능력을 상실한 민족은 언제든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경제는 침체하고, 북한은 수시로 ICBM을 쏘아대는 이 때... 이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여야의 소모적인 정쟁보다는 지도자나 위정자 그리고 국민들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