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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녹화 장면을 보는 듯한 현장 기록.

화별마 2023. 7. 17. 08:05

승정원일기 사진

 

승정원일기, 녹화 장면을 보는 듯한 현장 기록.

 

흔히 조선 시대 최고의 기록문화로 조선왕조실록을 꼽지만, ‘승정원일기와 비교하면 조선왕조실록은 요약본에 불과하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본 분량은 400여 권이 될 만큼 방대하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보다 무려 분량이 5배가 넘는다.

 

현재 3245책이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를 실록처럼 한글 번역본으로 출간하면 2,000권은 될 듯... 조선을 제외하고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승정원일기의 가장 큰 장점은 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실록이 임금이 죽고 난 후, 기록을 재가공하고 재편집한 것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임금을 따라다니며 그때그때의 현장을 기록한 것이다.

 

또 담긴 내용이 무척 방대하고, 마치 녹화 화면을 보듯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며, 통치 사료를 현장에서 속기록으로 남긴 유례는 조선이 유일하다.

 

승정원일기에는 국정 운영과 관련된 사료뿐만 아니라 날씨와 천재지변, 왕의 병증과 처방, 왕과 신하들의 신상과 언동 등이 자세하게 담겨 있어 역사학과 다른 분야의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조선 세조 때 공신 홍윤성은 부인이 있음에도 양주 좌수의 딸을 탐냈는데, 처녀는 첩이 아니라 정식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홍윤성은 이를 들어주기로 하고 숭례문 밖에 집을 구해 함께 살았다.

 

홍윤성이 죽은 후 적처 자리를 놓고 큰 다툼이 벌어졌을 때, 후처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승정원일기 덕분에 다툼에서 이길 수가 있었다.

 

좌수의 딸은 언젠가 세조가 홍윤성을 따라 자신의 집에 와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며, 이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부인이 술을 쳤는지 이 술을 따랐는지 확인해 보면 누가 적처인지 알 수 있다고 한 것...

 

이에 승정원일기를 조사해 보니 과연 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건 심리를 맡은 성종은 어쩔 수 없이 2명 모두를 적처로 인정, 재산을 반씩 나누게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승정원일기는 국정 운영 전반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날짜순으로 기록, 왕도 어쩌지 못할 전례이자 증거 자료로서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왕에게 누가 술을 따랐는지까지 기록할 정도로 담긴 내용도 아주 세세하다.

 

실록은 사관이, 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주서가 입시해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사초나 시정기처럼 세초(洗草)하지 않고 보존하는 점이 다르다.

 

사관과 주서는 왕의 말을 실시간 한문으로 번역해서 적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속기사와 동시통역사의 능력을 갖춰야 가능했다. 따라서 문과 급제자 가운데서 성적이 뛰어나고 가문이 좋은 인물들이 주로 선발되었다.

 

사관과 주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은 재((()으로, 이를 삼장(三長)이라고 했고, 재는 재주, 학은 배운 정도, 식은 판단력을 말하는데, ··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으로 상황에 맞게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기부터 선조 대까지의 기록이 임진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뒤 다시 복구되지 못했고, 이괄의 난(1624), 영조 20(1744)과 고종 25(1888)의 화재, 순조 연간의 분실 등으로 많은 부분이 없어졌지만, 그때마다 개수와 복원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원년(1623)부터 순종 융희 4(1910)까지 288년 동안의 기록이지만, 이 반쪽 기록도 단일 기록으로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