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과거시험, 나라의 인재를 수혈하는 주요 수단.

과거시험, 나라의 인재를 수혈하는 주요 수단.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에 거행된 과거시험... 문과의 시제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출제되었다. ‘근래 홍건적이 강을 건너 침략했는데,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어떤 책(策)과 술수(術數)가 의(義)에 합치하겠는가?’ 당시 이 과거시험에 응시했던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난 23살이 된 청년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답안을 써내 장원 급제를 한다. ‘문무를 함께 써야 하는 것은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며 만대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근래에 이런 것들이 무너져 홍건적이 생겼다. 문무를 겸한 인재를 중용해야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강태공, 사마양저(제나라 병법가), 제갈량 같은 사람들이 문무를 겸해 인의(仁義)로..

정조대왕의 애절한 사랑, 옷소매 붉은 끝동.

정조대왕의 애절한 사랑, 옷소매 붉은 끝동. 우리 한복의 끝동은 옷소매의 끝에 다른 천을 덧댄 것을 말하는데 붉은색의 끝동은 궁녀들이 입었던 복식이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역적의 아들로 몰려 한성을 떠난 오라비와 다시 만나기 위해 큰돈을 모아 족보를 사들인 후, 오라비의 신분세탁을 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지키려는 한 궁녀 그리고 정조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면서 아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기록으로도 전해질만큼 애틋하고 애절하다. 조선 시대 정조는 5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정식 왕비였던 효의왕후, 효의왕후는 정조의 세손 시절부터 세손의 비 역할을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

밀양 표충비, 국가 경사나 국난 징조 때면 땀을 흘리는 비석.

밀양 표충비, 국가 경사나 국난 징조 때면 땀을 흘리는 비석. 예전 밀양에는 표충사가 두 곳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는데, 모두 사명대사와 연관이 되어 같은 장소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의 서쪽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표충사(表忠寺)는 동쪽 끝 단장면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표충사당을 표충사로 옮겨 모시고 있다. 처음 홍제사는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표충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으나 현재는 표충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데, 홍제사가 있는 무안면은 사명대사의 출생지이자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白霞庵)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홍제사 경내의 표충비각에는 ‘땀나는 비석’으로 널리 알려진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742년(영조 18..

조선 시대 관직의 이동과 교체는 얼마나 빈번했을까?

조선 시대 관직의 이동과 교체는 얼마나 빈번했을까? 조선 시대의 관직은 18품 30계로 되어 있었는데, 장원급제를 하면 6품부터 시작했다. 또 관직에는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이 있었고, 실직에는 녹관(祿官)과 무록관(無祿官)이 있었으며, 녹관은 다시 정직(正職)과 체아직으로 구분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관직의 이동과 교체는 얼마나 빈번했을까? 조선왕조 중 가장 뛰어났던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시절, 황희는 약 23년간 정승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고 조선 시대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관리들의 보직 이동이 빈번했다. 일례로 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은 조선왕조 518년 동안 1375번이 바뀌었는데, 평균 재직기간이 약 130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태조는 대사간을 1년에..

모난 홍귀달이 연산군에게 정 맞다.

모난 홍귀달이 연산군에게 정 맞다.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하거나 강직하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는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을 맞는 일이 모난 개인의 탓일 수도 있지만, 그 모난 돌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나 주변 사람, 혹은 지도자의 좁은 마음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칙을 고수하는 모난 돌 같은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면, 그 시대 지도자의 포용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때는 연산군 시절, 스스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은 홍귀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세조 때 과거에 급제, 관직에 오른 이래 성종 때에는 대사성, 대제학,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거쳤고, 문장력이 뛰어나 중신(重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의 임금, 공부와 시험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의 임금, 공부와 시험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권근은 이렇게 훈계했다고 전한다. ‘세자는 과거에 급제할 필요가 말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한 가지 재주로 입신출세할 수 있지만, 임금은 배우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없으며 정치를 못 하면 나라가 곧 망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 임금의 맏아들인 원자(元子)와 세자를 나라의 근본, 즉 ‘국본(國本)’이라 불렀는데, 훗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았기 때문... 따라서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잘 씻은 탯줄을 태 항아리에 넣은 후, 태실(胎室)에 정중히 봉안하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조선 시대에는 태를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 생명선으로 생각했으며, 태가 좋은 땅을 ..

명당의 조건, 장풍득수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명당의 조건, 장풍득수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오래전, 땅의 지기를 이용, 왕을 만들기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영화 ‘명당’을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다가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이 떠올랐다. 경주 교동 최부잣집은 400년 동안 9명의 진사와 12명의 만석꾼을 배출해서 경상도를 대표하는 부자... 이 최부잣집은 ‘재산을 만 석 이상 모으지 말라, 흉년에 남의 논과 밭을 사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 6개의 가훈을 대대로 실천해 왔다.. 그런데 이 최부잣집의 가훈에는 6개의 가훈 이외에 은밀히 전해지는 가훈이 하나 더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명당이 있으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구해 쓰라는 것...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경주 교동에 터를 잡은 내력..

포경수술, 왜 이집트 신전은 수술한 남성만 입장할 수 있었을까?

포경수술, 왜 이집트 신전은 수술한 남성만 입장할 수 있었을까? 2500년 전, 수학 법칙 등을 만들어 우리 골치를 아프게 만든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유구한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신전으로 놀러 갔다가 바지를 벗고 사내의 소중이를 보여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군대 가기 위한 신체 검사장도 아니고 더군다나 목욕탕도 아닌 경건한 신전 앞에서 바지를 벗고 남자의 거시기(?)를 보여달라는 요구에 놀란 피타고라스,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의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신전은 성스러운 곳이라 소중이 ‘수술’을 받은 신성한 남자만 들어올 수 있소.’ 피타고라스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포경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 사실 피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