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156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풍경 스케치.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풍경 스케치. 1569년 음력 3월 4일, 69세가 된 퇴계는 여러 차례 귀향을 간청하다 마침내 선조의 허락을 받는데, 선조는 귀향하는 퇴계에게 호피요 한 벌과 후추 두 말을 하사하고 말과 뱃사공을 내준다. 1567년, 명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16살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선조는 백성의 신망을 받던 퇴계에게 어리석은 자신을 도와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할 수 없이 퇴계는 1568년 여름에 상경해서 정성껏 경연에 임하고 성왕의 이치를 담은 ‘성학십도’를 지어 올린 후, 떠나려고 했지만, 선조는 벼슬을 올려주며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러기를 몇 달, 노쇠한 퇴계가 혹시 건강이 나빠질까 싶어 신하들이 잠시라도 고향에 다녀오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선조도 마지못해 ..

세종과 성종, 경연의 가장 모범적인 임금.

세종과 성종, 경연의 가장 모범적인 임금. 경연(經筵)의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와 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를 제도화한다. 또 유학이 발달했던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정비되고 강의 교재도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이 확립되지만, 원과 명 그리고 청나라 때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때 처음 경연이 도입되었으나 활발하게 운영되지 못하다가 무신 집권 때 폐지한다. 그리고 원나라의 지배하에서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명맥만 유지했는데, 경연이 부진했던 이유는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기 때문... 그러나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숭유 정책을 실시, 경연은 비약적으..

포도청,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포도청,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조선 시대 포도청은 범죄자를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곳으로 한성과 경기를 좌우로 나누어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두었다. 이는 전국에서 들끓었던 도적의 횡포를 막기 위해 성종 2년 임시로 설치했던 포도장제(捕盜將制)가 중종 때 포도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정식 기관이 되었다. 포도청에는 최고 책임자로 좌우 포도대장이 각각 1명이 있었고 그 밑에 포도대장의 참모 역할을 하는 종사관을 각각 3명씩 두었다. 또 종사관 밑에는 포도부장과 군관과 말단 관속인 포도군사가 있었는데, 흔히 포졸이라고 부르는 말단이 포도군사다. 그들의 직속 상사 포도부장과 군관은 포교라고 불렀고 이들은 도적의 예방 및 체포를 위해 야간순찰과 그 밖에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했..

왜 나폴레옹은 미국 내 프랑스령을 싼값에 팔았을까?

왜 나폴레옹은 미국 내 프랑스령을 싼값에 팔았을까? 세계에서 4번째로 긴 미시시피강은 캐나다 국경 부근에서 발원해서 미국을 동서로 나누며 남북으로 흐르는 강인데, 이 강은 미국의 10개 주를 통과하며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은 프랑스인들이 미시시피강을 탐험하다 발견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영토가 되었는데, 1764년 프랑스인들이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후 정식 행정구역으로 승격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22년... 그런데 1803년 미국 중부에서 미국 영토의 틀이 잡히는 대사건이 벌어지는데, ‘루이지애나 매입사건’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와 미시시피강 사이 땅은 대부분 프랑스령으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미시시피강 서쪽 땅을 사들인 것... 오늘날 미국 영토의 23%에 해..

사대주의, 명분을 잃고 실리를 얻은 외교.

사대주의, 명분을 잃고 실리를 얻은 외교. 가끔 ‘신라부터 고려와 조선 그리고 구한말까지 중국에 사대(事大)하지 않았느냐’라는 물음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사실 19세기 이전까지 우리 민족은 중국에 의해 책봉을 받고 조공했지만, 이 땅의 왕들은 국내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었고 책봉은 단지 형식과 요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또 그것은 중국의 패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였고 조공 역시 하사 형식의 답례라는 반대급부를 동반하는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을 의미했다. 이런 조공무역에서 우리나라는 대개 흑자를 기록했는데, 중국의 패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무역흑자를 기록했으니 명분을 잃었어도 실리는 얻은 셈... 중국이 동아시아 정치적 메카로 올라선 기원전 2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대외관계는 대개 '강국은 명분, 힘없는 소국..

왜 미국은 총기의 천국이 되었을까?

왜 미국은 총기의 천국이 되었을까? 미국에서 연간 3만 명이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그래서 총기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얼핏 생각하면 총기를 모조리 회수해서 폐기 처분하던가 아니면 총기를 사고팔 때 절차를 복잡하게 하거나, 구입 자격을 엄격하게 하던가 별로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에서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총기 산업이 공룡만큼 덩치가 커져서 현재 2억 5천만 종 이상의 총기류가 팔린 상태라고... 이것을 시장 규모로 보면 우리 돈으로 1조 원에 육박해서 미국 정부의 세수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총기 산업을 규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거기에 총기 제조 업체나 협회의 정치적 로비도 상당히 거세다. 사실 미국에서 총기 구하기는 아주 쉬..

양반(兩班),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의미였을까?

양반(兩班),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 시대 국왕이 정무를 볼 때면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데, 이를 남면(南面)이라고 불렀다. 남면 한 국왕을 기준으로 왼편인 동쪽에는 문관(文官)이 동반(東班)으로 늘어섰고 오른편인 서쪽에는 무관(武官)이 서반(西班)으로 늘어섰으며 그밖에 잡역(雜役) 직은 남반(南班)이라 했다. 그러다가 차츰 동반과 서반을 중심으로 관직 제도가 정비되었는데, 남반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가 7품이었기에 고위관직은 동서 양반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을 두 개의 반(班)이라는 의미에서 ‘양반’(兩班)이라 칭하게 된 것... 이렇게 두 반을 나누어 처음 동반과 서반이라고 부른 때는 고려 성종 시기... 때문에 양반이라는 용어는 이미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양반은..

병자호란, 왜 청 태종은 조기 귀국을 했을까?

병자호란, 왜 청 태종은 조기 귀국을 했을까?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보다 강대국이었고 인조가 나와서 치욕적인 항복을 할 정도로 전쟁에서도 승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급하게 돌아갔을까? 청나라의 만문노당(滿文老檔)이라는 문헌을 보면 청이 조선을 어떤 방식으로 통치를 하려고 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수송에 이용할 큰길 주변의 조선인에게 헛되이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 그들은 모두 우리의 수에 포함될 조선인이니라.’ 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조선 정복에 참전한 팔기군은 절과 능묘의 파괴, 항복한 성에 대한 약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해 등을 금지하고 항복한 자를 잘 보살펴주고 변발시킬 것을 명령받았다. 이를 보면 청 태종은 구체적인 구상은 아니지만, 조선을 통치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