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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리더십, 예송 논쟁을 이념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화별마 2023. 10. 4. 09:03

조선 시대 현종 이미지

현종의 리더십, 예송 논쟁을 이념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1659.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18살의 현종은 첫 정치 현안으로 상복을 입는 기간을 정해야 했는데, 이것이 예송논쟁’(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시작이다.

 

기해예송은 자식인 효종의 죽음에 부모이자 효종의 새어머니 장렬왕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조정 중신들이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싸운 일이다.

 

이 논쟁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정치적 함의를 따져보면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효종의 아버지 인조가 장남 소현세자가 죽은 후 장손이자 소현세자의 장남이 아닌 차남, 즉 효종이 왕위를 잇게 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에서 패배 후 경직되고 보수화되어 가던 당시 조선에서 장자 우선이라는 유교 원칙을 무시한 인조의 결정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서인과 남인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장자 우선원칙을 어긴 왕실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기해예송은 국왕의 정통성을 둘러싼 정치 투쟁으로 비칠 수도 있었지만, 결국 1차 예송은 서인의 논리대로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해서 치르는 삼년상이 아닌, 차남으로 인정한 일년상으로 결론이 난다.

 

겉으로 보면 조선 초기에 정한 예법에 기록된 장·차남 상관없이 일년상을 치렀다는 점을 내세워 정통성시비를 일단 최소화한 셈...

 

하지만 15년 뒤 서른 살이 넘은 현종은 2번째 예송과 마주하는데, 이번에는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죽음에 따른 상복 문제였다.

 

당시 장렬왕후는 생존해있었다. 서인 중심의 조정은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간주, 장렬왕후의 상복 입는 기간을 9개월로 정하지만, 한 유생이 이를 문제 삼으면서 2번째 예송인 갑인예송이 벌어진 것...

 

이번에는 현종과 서인의 대립으로 진행되었는데, 현종은 1번째 예송 당시 겉으로는 조선 초기에 정한 예법의 원칙을 따른 점을 지적하며 왜 지금과 옛날이 다르냐고 물었다.

 

서인은 현종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했고 명분에서 현종이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종의 사후 처리...

 

현종은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이 정통성 시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로 끝난 2번째 예송에서도 서인 영의정 김수흥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에 올리는 정도로 끝냈다.

 

효를 중요하게 여겼던 조선 시대에 아버지 효종의 상복 문제는 왕의 정통성 시비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로 자칫하면 역모로까지 몰릴 수 있는 위험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슬기롭게 예송을 이념적 갈등이 아닌 정책적 갈등으로 다루며 수위를 관리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모든 인간은 생각이 모두 다르고 자신의 경험과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를 이끄는 정치에서 갈등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지만, 문제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갈등을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어떻게 보면 때와 상황 그리고 조건에 맞추어 갈등을 관리하는 것은 정치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정치인들은 17세기 중·후반 조선을 다스렸던 현종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그는 이념적 대립을 부추기지 않고 유연하게 관리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