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예술 잡학 165

칼라 보노프, 아일랜드 민중 시를 노래한 포크 가수.

칼라 보노프, 아일랜드 민중 시를 노래한 포크 가수. 기타 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가수가 되겠다고 말한 어느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칼라 보노프... 1952년 LA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작곡가로 데뷔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960년대에는 자신의 언니인 리사 보노프와 함께 인근 클럽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브린들(Bryndle)’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지만 화려한 라인업에도 불구하고 음반사로부터 외면당하며 앨범도 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해산 후 멤버 중 케니 에드워즈와 앤드류 골드가 린다 론스테드의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이 칼라 보노프의 곡들을 소개해 주었고, 1976년 린다 론스테드의 음반에 칼라 보노프..

알랭 들롱, 세계적인 미남 배우도 안락사를 선택했다.

알랭 들롱, 세계적인 미남 배우도 안락사를 선택했다. 세계적인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은 장폴 벨몽도, 브리지트 바르도, 카트린 드뇌브, 잔느 모로, 장루이 트랭티냥과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한 명... 영화 ‘태양은 가득히’, ‘한밤의 살인자', ‘미스터 클라인’,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조로' 등에 출연, 세계적인 배우로 사랑을 받았다. 또 1995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 곰상을 수상했으며, 레지옹도뇌르 훈장과 칸 영화제 명예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4년, 그는 나탈리와 극비에 결혼식을 올렸고 1967년도에 개봉한 영화 '고독'을 통해 함께 연기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 슬하에 아들 안토니 들롱을 두고 결혼 생활을 4년여간 지속했으나 알랭 ..

피카소, 그에게 여자는 그림을 위한 도구였다 (2)

피카소, 그에게 여자는 그림을 위한 도구였다 (2) 피카소의 여성 편력은 도르 마르가 끝이 아니었다. 1943년 여름, 62살이 된 그는 22살의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유혹한다. 화가 지망생이던 질로가 친구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천재 화가 피카소 앞에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 것...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의 유혹에 잠시 망설이던 질로는 결국 그의 애인이 되기로 결심, 어느 날 피카소를 유혹해 뜨거운 밤을 보내고 몇 년 사귀다가 매정하게 차버렸다. 그녀는 피카소를 차버린 유일한 여자로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질로라는 새 애인의 존재를 알면서도 피카소와 함께 살던 도라 마르는 괴로워하며 늘 눈물을 흘렸다고... 피카소에게 여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는..

피카소, 여자와 몸을 섞어야 비로소 그림을 그렸다 (1)

피카소, 여자와 몸을 섞어야 비로소 그림을 그렸다 (1) 스페인이 낳은 천재 중의 천재라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 그는 20살에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청색시대’와 ‘장미시대’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일찍부터 비평가와 대중의 주목을 받은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려본 적 없는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고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그림 양식을 탄생시켰는데, 스페인은 물론 유럽 사회에 엄청난 파장과 함께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 하지만 20세기 초 파리에서 고가에 팔리는 그림의 특징은 ‘새로움’으로, 그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은 미술 애호가보다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은 피카소는 1918년 러시..

가수 이장희, 4살 때 천자문을 뗀 신동 포크 뮤지션.

가수 이장희, 4살 때 천자문을 뗀 신동 포크 뮤지션. 1947년, 경기도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이장희... 그는 4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근동 마을에서는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소문이 자자했던 신동이 성장해서, 조영남과 송창식, 김세환과 정미조 그리고 사랑과 평화 등 당시 잘 나가던 가수들과 그룹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주고, 직접 노래까지 하는 작곡가이자 가수가 된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중퇴한 이장희와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강근식은 1960년대 후반 ‘생음악 살롱가’에서 듀엣 ‘이장희와 강근식’으로 처음 만난다. 사실 이장희는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에 윤형주와 함께 ‘라이너스’라는 보컬 그룹에서 활동했었고, 강근식은 ‘홍익 캄보’라는 그룹을 만들어 홍익대학교에서 활동..

고흐, 진짜 그의 귀를 자른 사람은 누구일까?

고흐, 진짜 그의 귀를 자른 사람은 누구일까? 예술가는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가 남긴 작품이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가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해바라기’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 무려 580억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을 기록했다.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쥔더르트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개신교 목사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무직으로 지내던 20대 후반, 동생 테오의 격려로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화가가 되어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팔리지 않자 화구상이었던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얻어 쓰며 지냈는데, 모델료나 그림 도구를 사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공복에 담배만 피우곤..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의 첫 부인 패티 보이드의 변명(2)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의 첫 부인 패티 보이드의 변명(2) 나는 조지 해리슨이 인도 음악에 빠져 나에게 관심이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예전의 우리 사이로 돌아가기를 바랐고,, 에릭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부러 에릭에게 접근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에릭이 나를 사랑할 줄은 전혀 예상조차 못 했지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에릭은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 여동생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하더군요. 의도적이긴 했지만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짧은 기간 동안 교제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와의 사랑을 기뻐하면서도 겁이 나서 그에게서 달아나듯 교제를 중단했습니다. 나의 교제 거부와 에릭의 친한 친구였던 지미 헨드릭스의 죽음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에릭은 그 후 4년 동안 마약에 의지해서 살..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의 첫 부인 패티 보이드의 변명(1)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의 첫 부인 패티 보이드의 변명(1) 거의 60년이 되어가는 긴 세월 속 이야기지만, 나와 조지 해리슨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많아 정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씁니다. 1964년 내가 조지 해리슨을 처음 만난 해입니다. 비틀스의 첫 영화 ‘A Hard Day's Night’에 비록 단역으로 출연한 그 당시, 나도 무명이었지만 해리슨 역시 비틀스의 멤버 중 가장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조용한 비틀’ 혹은 ‘정직한 비틀’이라고 친근하게 불렀습니다. 1943년 2월 25일, 영국 리버풀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직 음악 하나에만 매달려 있던 때라 나를 만나기 전에는 연애에 정말 숙맥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