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시사 잡학

기생,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별빛마을 손호종 2024. 10. 18. 19:29

 

기생,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얼마 전 국민의 대표라는 모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중 국악인들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기생집을 만들어 놨다라는 막말로 국악 공연과 국악인들을 비하한 것...

 

흔히 기생은 기녀(妓女) 또는 여기(女妓)라고 불리며 관청 소속의 천인 신분으로 나라의 재산인 관비로 ()’를 업으로 삼는 여인이라는 의미이며 어원은 대나무 악기()를 다루는 여자()’...

 

여기(女妓)’ 역시 음악을 하는 여인으로 이때의 음악은 궁중의 연회에서 선보이는 고유한 노래와 춤, 악기 연주를 의미하는 여악으로 조선 초기 궁중 음악을 정리하며 폐지하려고 했지만, 세종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기생은 노래 부르는 성기(聲妓)와 춤을 추는 무기(舞妓), 악기를 다루는 악기(樂妓) 등으로 구분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이런 구분이 사라지고 가무는 기생이, 악기 연주는 악공이 맡았는데, 폐활량이 중요한 피리나 대금 같은 관악기는 주로 남성 연주자가, 기생들은 거문고나 가야금 등의 현악기를 연주했다. 특히 여악에서는 여성 악공을 현수(絃首)’ 혹은 코머리라고 불렀다.

 

기생은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느냐에 따라 중앙의 경기(京妓)와 각 지방의 관기(官妓)로 나누었고 경기는 음악을 관장한 장악원 소속으로 기생 중 가장 상급으로 인정받았다.

 

반면, 관기는 술맛을 돋우는 술국이라는 의미의 주탕(酒湯)이라 불렀으며 경기에 결원이 생기면 관기 중 일부가 서울로 올라왔고 이들은 가려 뽑아서 올려 보낸 기생이라는 의미의 선상기(選上妓)’라고 불렀다.

 

경기는 주로 궁중 연회에서 춤과 노래 솜씨를 펼쳐 여흥을 돋우었는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도 동원되었다. 국가 행사가 없을 때는 고관들의 잔치에 참석, 이것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으며 일반적으로 경기의 수는 150명에서 200명 사이였다고.

 

그리고 지방 관기는 관아나 지방 유지의 잔치에 불려 갔으며 가끔 왕명을 받은 봉명사신 혹은 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들면 수청기생이라고 불렀다. 원래 수청(守廳)은 관리가 숙소에 머물 때 청사에 머물며 수발을 들고 잠자리까지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방을 지키는 기생이라는 의미의 방수기(房守妓), 방직기(房直妓), 혹은 방기(房妓)라 불렀다. 처음에는 여성 광대를 뜻하는 창기(倡妓)와 구분했지만, 나중에는 이런 잠자리 시중이 매춘의 성격을 띠면서 몸을 파는 여자라는 창기(娼妓)와 혼용해서 불렀다.

 

관기 중에서도 처지가 가장 열악했던 기생은 방직기로 일부 방직기는 변방으로 발령이 난 군관들의 현지처 노릇도 하고 살림과 잠자리까지 해야 했다. 그러다가 군관이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른 군관과 함께 살았다고...

 

관기의 수는 현() 단위의 작은 고을에는 10명 내외였고 부() 정도의 중간 고을에는 20명 내외, 각 도의 관찰사가 머물렀던 감영에는 100명 안팎의 기생이 있었다.

 

특히 기생으로 이름을 난 지역은 평양으로 이곳은 색향(色鄕, 미인이 많이 나는 고을)으로도 유명했으며 많을 때는 180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그러나 기생의 수가 가장 많았던 곳은 함경도 북청... 북청이 위치했던 함경도 남 병영에 소속된 관기의 숫자만 400여 명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변방을 지키는 군관들의 현지처였던 방직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