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음식 잡학

호떡, 양귀비가 이 맛에 빠진 이유는?

화별마 2023. 7. 30. 07:22

호떡 사진

호떡, 양귀비가 이 맛에 빠진 이유는?

 

756년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이 수도 장안으로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현종은 궁궐을 버리고 쓰촨성 파촉으로 피란 간다장안에서 25Km쯤 되는 함양의 망이궁에 다다를 무렵 급하게 피란길을 떠나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현종 일행은 배가 고팠다.

 

그러자 양국충이 시장에서 호떡을 사서 현종과 양귀비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자치통감과 역대 중국 역사책 중 흥미로운 이야기만 골라 모은 이십사사통속연의(二十四史通俗演義)’에 실려 있다.

 

그렇다면 1300여 년 전 황제가 배가 고프다는데 좋은 음식 다 놔두고 왜 호떡을 사서 바쳤을까? 아무리 급하게 떠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불과 60리쯤 왔을 뿐인데...

 

당시 호떡은 서민들의 군것질거리나 값싼 길거리 음식이 아니었다. 양국충이 사 온 호떡은 황제 일행이 먹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고급 음식이었다.

 

사실 양귀비가 먹은 호떡에는 상징적 의미가 큰데, 시장에서 사 온 호떡에는 당시 당나라 상류층의 음식 문화 그리고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를 비롯, 8세기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떡의 뿌리는 서역의 중앙아시아... 우리나라에는 임오군란 이후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가 전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음식이다.

 

조선 중기 이후 여러 문헌에 호떡(胡餠)’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조선 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에도 중국의 호떡인 소병(燒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당시 대마도 도주에게 선물로 두 상자를 보냈을 정도로 이때 호떡은 귀했던 밀가루로 구운 음식이었으니 상류층의 별미였던 셈...

 

호떡은 서역풍의 음식인 만큼 호인(胡人)들이 먹는 떡이라는 뜻... 여기서 호()는 오랑캐가 아닌 서역에 사는 사람들 즉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그리고 아랍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먹는 난이라는 빵이 호떡의 조상쯤 되는 셈으로 고대의 난인 밀가루 빵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것...

 

명말 청초 때의 학자인 장대가 쓴 야항선이라는 문헌에는 호떡을 김일(金日)이 만들었다고 나오지만, 중국 역사에서 호떡과 관련해 김일이라는 인물은 없다. 따라서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과의 교통로를 개척할 때 한나라에서 귀화한 흉노족 왕자 김일제(金日磾)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서역에서도 호떡이 상류층의 식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떡이 전해지자 중원의 상류층에서 오랫동안 호떡 열풍이 불었다. 한나라 제12대 황제인 영제는 무능해서 한나라 말기 환관 정치의 막을 열었던 황제... 이 영제가 호떡에 빠져서 매일 호떡만 먹고살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현종과 양귀비도 호떡을 먹었지만 양귀비의 슬픈 사랑을 노래했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 역시 호떡을 좋아했다고...

 

중국식 호떡은 직접 불에서 굽지 않고 화덕에서 곁불을 쪼이면서 굽는 방식... 호떡은 이런 서역의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 음식이었다.

 

난을 피해 피난을 떠날 때까지 부귀영화와 사치를 누린 천하의 미인 양귀비의 식사가 호떡을 먹을 만큼 초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양귀비는 귀비답게 당시 상류층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