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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지밀,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까?

화별마 2023. 12. 1. 08:16

강녕전 사진

조선시대 왕의 지밀,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까?

 

조선시대 궁궐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內殿), 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외전(外殿), 세자의 활동공간인 동궁(東宮), 휴식 공간인 후원(後苑), 궁궐 안에서 업무를 보는 관청인 각사(各司)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국왕의 침소는 궁궐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서 지밀(至密)이라 불렀는데, 화려한 곤룡포와 면류관으로 치장한 왕이 아닌, 평복을 입은 왕이 생활한 침전(寢殿)이었다.

 

이런 연거지소(燕居之所)로 경복궁에는 강녕전(康寧殿), 창덕궁에는 희정당(熙政堂)이 있었다.

 

이들 전각은 정남향의 육간대청을 중심으로 동 온돌과 서 온돌로 구분했는데, 동 온돌은 국왕의 침실이고 서 온돌은 왕비의 침실...

동 온돌은 구조가 특이해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병풍을 치고 그 중앙에서 국왕이 잤는데, 병풍 바깥쪽에는 네 사람의 지밀상궁이 밤을 지새우며 왕의 침수(寢睡)를 지켰다.

 

이때 상궁이 졸지 않도록 딱딱한 목침만 갖다 놓고 절대 폭신한 베개를 쓰지 못하게 했다고...

이렇게 국왕과 왕비는 방을 따로 쓰고 자다 일진(日辰)을 보아 한방을 썼는데, 지밀상궁이 궁녀에게 오늘 밤은 동 온돌에 기수 배설(排設)하라고 이르면 궁인이 이부자리를 동 온돌에 깔았다.

 

이렇게 모처럼 동침하는 날 밤이면 왕비는 분홍빛 저고리에 남치마 차림으로 노란빛 속옷에 쪽진 머리를 하고 동 온돌로 들어갔다.

그러나 국왕이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을 경우, 때때로 국왕은 내명부(內命婦)의 나인(內人)을 데리고 잤다.

 

나인이 하룻밤이라도 국왕과 침실을 같이 쓰면 시침(侍寢)했다고 해서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고 그래서 시침을 승은(承恩)이라 했으며 승은이라는 궁중 용어는 나인이 임금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표시였다.

 

국왕이 평소 눈여겨보았던 젊은 나인이 있으면 상궁을 불러 오늘 밤 ○○을 시침토록 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이 나인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일약 ()’이나 귀인(貴人)’으로 승격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내명부조에 따르면 빈은 정일품(正一品), 귀인은 종일품(從一品)에 해당하는 높은 직위였다.

중국 황실은 후궁이 너무 많아 황제가 그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 없었는데, 한무제(漢武帝)의 경우 저녁이면 말을 타고 가다 말이 멈추는 곳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 황실처럼 후궁이 많지 않았지만, 평생 승은을 받지 못한 외로운 후궁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