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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 행차, 왜 했으며 의미는 무엇일까?

화별마 2023. 11. 10. 10:07

화성 행차 반차도

정조의 화성 행차, 왜 했으며 의미는 무엇일까?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는 그동안 이룩한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힘을 싣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1795년 윤달 29,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가는데, 이 행차를 준비한 것은 179412월부터...

 

먼저 행사를 주관하는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10만 냥을 경비로 마련했는데 모두 왕실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또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 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게 특별히 설계된 가마 2개도 제작되었고, 1,800여 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지금의 1번 국도 시흥로가 새로 건설되었으며 적은 비용으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도 만들어진다.

 

의궤에 따르면 정조는 어머니를 앞질러 갈 수 없고 곁에서 모시는 게 도리라는 이유로 갈 때와 올 때 가마를 타지 않았다고...

 

행차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앞부분 63면에 걸쳐 흑백으로 그려진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원은 1,779명이지만,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는 자들을 포함하면 6천여 명에 달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건너 노량 행궁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는 시흥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은 시흥을 출발, 청천 평에서 휴식했고, 사근참 행궁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점심 무렵 비가 내리자 정조가 길을 재촉해서 저녁 무렵 화성 행궁에 도착하는데,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으로 들어갈 때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했다고...

 

셋째 날 아침 화성 향교의 대성전에서 참배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문, 무과 별시를 거행. 문과 5인과 무과 56인을 선발한 후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 예행연습을 한다.

 

넷째 날 아침 현륭원에 참배했는데, 이때 정조는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 씨가 크게 슬퍼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는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정조가 직접 주관한다. 화성에 주둔한 5천 명의 친위부대가 모두 동원된 이 날 훈련은 정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을 겨냥한 측면도 있었다.

 

다섯째 날은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거행, 봉수당에서 열린 잔치에 궁중 무용 선유악이 공연되었다.

 

의궤에는 의식 진행 절차,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된 상황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날은 화성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백성들을 배려하려는 정조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이 양로연에는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한다이날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다르지 않아 왕의 밥상을 노인들도 받았다.

 

공식 행사가 끝난 후 정조는 화성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한낮에는 화성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다.

 

다음 날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 하룻밤을 잤고 마지막 날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린다는 지금의 지지대(遲遲臺)라는 이 고개의 이름은 이때 정조의 화성 행차에서 유래한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동갑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회갑이라는 해를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의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치른 부모에 대한 효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차를 통해 왕권을 과시하고 화성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 도시로 키워나가려는 꿈과 야망이 담겨 있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 늘 불안감을 느껴 갑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 정도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다.

 

정조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규장각을 건립한 것이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세운 것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그리고 마침내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고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