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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왜 일어났고 결과는 무엇일까?

화별마 2023. 11. 11. 12:39

러시아혁명 이미지

러시아혁명, 왜 일어났고 결과는 무엇일까?

 

세계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사건 중 하나가 러시아혁명...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산업화가 많이 진전된 국가에서 일어난다고 했지만, 러시아혁명이 그 예상을 뒤엎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게 진행되었고 자본주의 발달도 미약한 상태였는데, 어쩌면 러시아가 그렇게 뒤처져 있었기에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떠들며 민주주의를 모색할 때,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가 전제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861년 농노 해방령 이후에도 농민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토지가 충분하지 않았고 질도 안 좋았다. 게다가 농민들은 그런 토지를 시세보다 비싼 값에 사야 했고 다른 신분들보다 세금 부담도 많았다.

 

이렇게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에서도 사회 변화가 일어나, 정부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한 결과 공장 노동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던 것... 그러자 인텔리겐치아라 불리는 지식층의 개혁 요구도 계속되고 사회주의 사상도 들어온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1,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와 가족들이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함께 행진한다.

 

이들은 겨울 궁전으로 가서 노동 시간 단축 등 개혁 요구를 적은 문서를 전달할 생각이었고 선두에 선 가폰 신부가 평화 시위임을 미리 정부에 알린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이 겨울 궁전의 광장에 도착하자 군대가 행진 중지를 명했고 총을 발사, 광장의 눈밭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며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사람들은 차르에 대한 충성심과 기대를 완전히 버렸고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들의 봉기가 이어진다.

 

이어서 군인들도 혁명의 대열에 합류하자 차르 니콜라의 2세는 마지못해 국회인 두마 설치 등 개혁을 약속하며 전제정치를 이어간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러시아는 막대한 인명피해와 경제난에 부딪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을 친다.

 

19173, 사람들의 불만이 혁명으로 터져 나오는데, 여성 노동자와 주부들이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빵을 달라며 시위한 데 이어,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파업에 돌입하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진 것...


병사들도 혁명의 대열에 합류하고 이어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들은 소비에트 평의회를 조직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던 1905년에는 차르가 군대에 의지하면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병사들이 혁명 세력의 일부가 되자 차르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임시 정부가 세워져 소비에트와 양립한 가운데 두 세력 간의 싸움이 불가피해진다.

 

4, 정부의 탄압을 피해 망명가 있던 레닌이 돌아오고 그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 토지를 농민에게, 전쟁을 즉시 중지할 것을 내세운 레닌의 연설에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당시 레닌은 볼셰비키를 이끌고 있었는데, 볼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레닌 일파가 승리했을 때 다수파라는 의미로 스스로 붙인 이름...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트(무산 계급)의 독재를 위해 의회 민주주의를 포기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자혁명가당과 맨셰비키 (소수파) 등 여러 세력이 있었다.


11,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며 전쟁을 끝내고 토지와 주요 산업을 국유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