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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덕임, 칠궁(七宮)에서 제사를 지낸 후궁.

화별마 2023. 6. 30. 07:28

정조 사진

 

의빈 성씨 덕임, 칠궁(七宮)에서 제사를 지낸 후궁.

 

칠궁(七宮)은 조선 시대에 왕을 낳은 7명의 후궁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 이곳은 원래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를 모신 육상궁이었는데 1900년대 초, 후궁 6명의 사당과 합쳐 칠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칠궁이 만들어진 배경은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세력 싸움을 하면서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 발생하자 이런 사태를 방지하겠다며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고 숙종이 어명을 내렸기 때문...

 

이전에는 후궁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되면 생모는 왕후로 추존이 되었지만, 이후로는 생모에게궁호만 내렸다. 하지만 궁호를 받았다고 대비와 같은 신분은 아니었고 실질적인 지위는 세자와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칠궁을 만들어 죽은 왕의 친모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

 

그런 칠궁에,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닌 왕세자를 낳은 후궁의 위패를 모시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주인공은 정조의 후궁이었던 의빈 성씨 덕임... 궁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 의빈 성씨다.

 

오래전, 종방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이 널리 알려진 대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애틋한 사랑은 참 대단했다. 의빈 성씨 덕임은 정조와 15년 동안 썸을 탔고, 정조의 고백을 두 번 만에 받아들인 궁녀...

 

그리고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했고 셋째가 뱃속에서 9개월 되었을 때, 정조 곁을 떠난다. 의학에 두루 해박했던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의빈 성씨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긴 하다.

 

또 후궁이 세상을 떠나면 왕이 후궁의 무덤을 다녀오는 경우가 전무한데, 기록에 정조가 의빈 성씨 덕임의 무덤을 여덟 번가량 다녀온 것을 보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의빈 성씨를 잃은 정조는 자신을 의탁할 데가 더욱 없어졌다는 말도 남겼다.

 

의빈 성씨 덕임은 왕세자를 낳은 후궁이었지만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니라서 영조의 친모 숙빈 최 씨 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 틀을 깨고 죽은 의빈 성씨 덕임에게 의빈궁(宜嬪宮)이라는 궁호도 내리고 숙빈 최씨의 사당이 있는 육상궁에 같이 위패를 봉안했다.

 

정조는 위계질서와 신분을 분명하게 따지는 왕이었지만 사랑했던 의빈 성씨 덕임을 위해 칠궁에 위패를 모신 것... 정조가 죽은 후에도 의빈 성씨의 제사가 이곳에서 올려졌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869, 철종이 의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직접 행차까지 한다. 이렇게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의빈 성씨 덕임은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닌데도 왕을 낳은 후궁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던 1908, 순종은 왕실의 제사 칙령을 발표, 불필요한 제사를 줄여 재정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한다. 사실 순종의 속내는 왕실 법도에 안 맞는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 결국, 순종의 칙령에 의해 의빈 성씨의 위패는 칠궁에서 사라진다.

 

칠궁의 원조 격인 숙빈 최씨,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와 나란히 제사를 받았던 의빈 성씨...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정조의 마음이 칠궁에도 흔적을 남겼다. 만약 순종이 칙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칠궁은 팔궁(八宮)으로 불리고 있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