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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명예혁명, 왜 명예롭다고 부르는 걸까?

화별마 2023. 11. 14. 10:57

명예혁명 이미지

영국의 명예혁명, 왜 명예롭다고 부르는 걸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왕비뿐만 아니라 황제 루이 16세도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그 후 폭동 및 혁명과 관련된 전쟁으로 200만 명의 무고한 프랑스 국민이 사망했고 또 재판으로 3만 명이 처형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프랑스 혁명은 사람들이 무리를 만들어 폭력을 정당화시킨 야만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영국은 프랑스와는 다르게 혁명은 있었지만 유혈 혁명은 없었는데, 그것을 역사가들은 명예혁명이라고 불렀다명예로운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 독특한 혁명은 도대체 무엇일까?

 

1688년 영국의 왕 제임스 2세는 개신교도를 박해하지 않았지만, 친 가톨릭 정책을 취해서 영국 의회와 국민은 혹시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당시 영국인들은 로마 가톨릭 국가로 회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제임스 2세가 이탈리아 출신 가톨릭교도 마리 모데나와 결혼, 아들을 출산하자 그 의심이 더 커진다.

 

그러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가 제임스 2세의 친 가톨릭 정책에 반대, 런던탑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회는 신교도이자 제임스 2세의 조카인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에게 밀서를 보내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제임스 2세를 추방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윌리엄 3세는 15천 명의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한다. 그러나 수적인 면에서 열세라 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승리한다영국군이 진 이유는 영국군 장교 대부분이 개신교도였기에 싸우기 전에 모두 항복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2세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고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혁명이라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

 

명예혁명의 결과, 국왕이 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권리장전을 승인하는데, 기존의 마그나카르타에서 규정한 의회 승인 없이 과세를 금지하는 것에 추가해서 의회 동의 없이 상비군 유지를 금하고, 선거의 자유와 의회 발언의 자유, 국민 청원권을 보장하고, 의원의 면책 특권 등도 보장한다.

 

이렇게 영국은 왕이 헌법 아래 놓임으로써 세계 최초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게 되었고 유혈 혁명은 없었지만, 당시 정치가 가장 발전한 나라가 된다.

 

사실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약 470년 전, 존 왕은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마그나카르타라고 불리는 자유 대헌장에 서명한다.

 

존 왕이 십자군 원정 때 발생한 전쟁비용으로 과도한 세금을 거두고, 프랑스와의 전쟁 끝에 프랑스에 있던 영국령을 잃어버리자 왕의 실정에 못 견딘 귀족들이 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 것...

 

이 마그나카르타에서 주목할 조항은 39조로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따르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의 몰수 또는 어떠한 방식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는 것...

 

이는 당시 매우 파격적인 조항으로 국왕도, 성직자도, 귀족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법의 지배에 따른 통치, 즉 법치를 천명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그나카르타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민의 자유다부당한 신체적 구속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인간 존엄의 바탕인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은 막고자 한 것으로 마그나카르타를 자유 대헌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