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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다방골. 왜 기생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까?

화별마 2024. 1. 3. 12:16

1920년대 서울 중구 다동 사진

서울의 다방골. 왜 기생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까?

 

1920년대 인구가 늘어나자, 서울은 외적으로 팽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현상은 지역의 분화와 인구 집중 그리고 심각한 주택난을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선 동소문 안의 문화촌과 수구문 밖 신당리 일대의 빈민촌, 정동의 서양인촌, 용산의 공업촌, 경성역 봉래교 인근의 노동촌, 그리고 다옥정과 청진동, 관철동, 인사동 일대의 기생촌과 같은 특수한 촌이 형성, 거기에 맞은 생활 풍속이 생겨난다.

 

이처럼 서울의 요릿집과 권번 근처에 있던 다방골, 즉 다옥정(茶屋町) 일대에는 기생들이 모여 사는 기생촌이 있었는데, 기생들은 주로 월셋집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기생들이 사는 다옥정 일대는 낮에도 장구와 가야금 소리가 노래와 함께 흘러나와 분위기를 돋우고, 저녁이 되면 인력거꾼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풍경이 연출되었다.

 

당시 다방골은 장안에서 부자가 많기로 소문이 났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다방골의 지형은 거북이 모양으로 옛날부터 전쟁 중에 재해를 입거나 화재 등이 일어난 적이 없고 변란도 피해 가는 형상이라고...

 

또 옛날, 이 지역에 차를 마시는 공식 예절인 다도(茶道)와 다례(茶禮)를 주관하고 궁중에 음식과 식품을 납품하고 조달하던 관청인 사옹원(司甕院))에 속한 다방(茶房)이 있었기 때문에 다방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19144월 일제에 의해 남부 중다동과 모교 상다동 그리고 하다동 일부를 합쳐 다옥정(茶屋町)이 되었고 광복 후에 다방골을 한자로 고친 것이 다동’...

 

1924년에만 해도 서울에는 기생이 대략 300명 정도 있었는데, 다방골에만 60명이 몰려 살아 다방골하면 먼저 기생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침 늦게까지 자는 잠을 다방골잠이라 부르는데, 밤늦게까지 웃음을 팔고 노래를 팔고 돌아온 기생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날 수 없으니 그런 말이 생겨났다고...

 

하긴 다방골에는 여유 있는 사람이 많이 살았으니 놀고먹는 기생들이 아침에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