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명월관, 어떻게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화별마 2023. 12. 26. 17:08

명월관 사진

명월관, 어떻게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명월관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따온 이름으로 명사와 한량들에게 편안한 장소와 푸짐한 음식을 대접한 대표적 요릿집 브랜드였다.

 

명월관은 조선 고종 때 궁내부 주임관(奏任館)과 전선사장(典膳司長)이었던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온 뒤 1909년에 생겨난 요릿집...

 

전신은 조선요리옥으로 명월관 본점은 종로구 돈의동 145번지, 지점은 종로구 서린동 147번지에 있었는데, 본점의 토지 평수가 1,200여 평이었고,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 총평수가 600여 평에 달했다.

 

안순환은 명월관을 개업, 궁중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했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이 담근 술을 써서 인기를 끌었는데, 처음에는 약주와 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 술도 팔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융희 3(1909)에 관기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다양한 기생들이 몸 기댈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명월관에는 많은 기생 중에 어전에서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 기생과 인물이나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았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장사도 잘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으로 발돋음한다.

 

1910년대 명월관은 이색적인 광고를 했는데, 종로 거리에 우산을 받쳐 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이 등장한 것... 나이가 든 기생이 앞에 서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동기(童妓)가 뒤를 따르는 행렬은 구경꾼들의 눈요기 감이 되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고...

 

그리고 앞서가던 기생이 선창 하면 뒤를 따르던 기생들이 화답하며 걸어가는 행렬 방식으로 요릿집 명월관을 선전했다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식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1918년 명월관이 불타버렸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당시 여러 이야기가 나돌았다이듬해 이종구가 명월관상호 명칭만 3만 원을 주고 인수하는데, 이종구는 1937년 종로 권번도 인수한 재력가였다.

 

명월관에서는 고유한 조선 요리와 서양요리를 만들었고, 주요 손님들은 고위 관료와 재력가, 외국인 등으로 1932년 조사에 의하면 하루 매상이 500원 이상이었고, 종업원의 숫자도 120여 명이나 되었다.

 

그 후 안순환은 새로이 태화관식도원을 세웠는데, 명월관은 서울에 있어 조선 요리업의 원조(元祖)’라는 이름이 높아 지방에서도 명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요릿집을 운영하는 이가 많았다.

 

현재 명월관 본점 자리에는 동아일보사 사옥이 들어섰고 지점 자리에는 피카다리 극장이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