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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록, 유배? 여행? 조선 시대 유배 생활.

화별마 2023. 11. 4. 08:41

북정록 사진

북정록, 유배? 여행? 조선 시대 유배 생활.

 

167411월 서인 계열의 유생 이필익은 서인과 남인이 왕실에서 상복을 입는 것을 두고 벌인 논쟁인 갑인예송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입장을 지지했다가 유배길에 오른다.

 

갑인예송은 예의 해석을 둘러싼 사상적 대립의 성격이 짙었는데, 남인의 승리로 끝나면서 그는 함경도 안변으로 유배가게 된 것...

 

북정록은 가로 22.8, 세로 32.3크기의 책으로 충청도 이산(尼山)에 거주하던 유생 이필익이 숙종 원년 유배지로 떠날 때부터 3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숙종 5년에 돌아오기까지 유배지에서 겪은 일들을 일기로 남긴 것이다.

 

흔히 유배를 떠올리면 힘들고 많은 고초를 겪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고생을 심하게 한 경우도 있지만, 생각보다 편하게 유배 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유배지가 유배자와 같은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 다스리는 곳이면, 유배는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재충전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는데, ‘북정록을 보면 그런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밤에 안변부에 들어갔다. 덕원에서 50리다. (중략) 거처할 곳은 이미 서문 밖 김예길의 집으로 정해두었다고 한다. 그 집에 이르니 김예길이 절하며 집을 수리 청소해 두고 기다린 지 여러 날이라고 하였다.

 

여러 친구들이 나의 가난과 고초를 보고 처가 오기 전에 첩을 얻을 것을 권했다. 모씨의 딸과 중매를 드는 사람이 있어 날짜까지 잡았는데, 겨우 6, 7일을 남기고 있었다. 이때 처가 안변으로 들어왔다.

 

형세가 미칠 수 없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진실로 배꼽을 잡을만하다. 5필의 말과 6명의 노비가 일시에 와서 호구지책이 걱정이다. 그러나 산 사람의 입에 어찌 거미줄을 치겠는가?’

 

이 글을 보면 죄인이 아니라 잘 아는 곳에, 여행하러 온 듯한 분위기며 유배 중에도 첩을 들일 것을 생각하는 너무 한가한 모습이다거기다가 부인과 말 그리고 노비까지 왔으니 유배지인지 고향 집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그 밖에도 유생 이필익은 안변부의 수령과 서원이나 향교, 유배지 인근의 지인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가며 편안하게 유배 생활을 한 것을 알 수 있고 그가 매일 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여유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일기를 보면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기도와 인천 지역에서 진행한 '조선 시대 개인 일기 학술조사연구'를 통해 경기도 광주 만해기념관에서 이필익이 쓴 것으로 보이는 일기 '북정록'(北征錄)을 찾았다.

 

북정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북찬록'(北竄錄)과 내용이 대동소이한데, 다만 1731년 김치후가 쓴 서문이 붙어 있는 북찬록은 이필익의 원본을 그의 손자 대에 필사한 것으로 북정록이 원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