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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와 편지 사랑을 했고 코스모스를 사랑했던 여류 시인.

화별마 2023. 10. 31. 10:21

여류 시인 이영도 사진

청마와 편지 사랑을 했고 코스모스를 사랑했던 여류 시인.

 

우리 고유의 시조를 계승해서 서정의 극치를 보여준 이호우 시인의 여동생은 황진이 이래 최고의 여성 시조 시인이라 불린 정운(丁芸) 이영도 시인이다.

 

이 남매는 경북 청도(淸道)가 고향으로 이영도 시인은 대구의 명문 부호 자제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29살의 나이에 홀어머니가 된다.

 

1945년 그녀는 대구 여자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로 옮겨 19535월까지 근무하는데, 그때 시인 유치환이 같은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의 애틋한 편지 공세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같은 학교에는 유치환 이외에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김춘수와 김상옥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같이 근무했고 또 이때 그녀는 병에 걸려 마산 결핵 요양원에서 휴양했고 믿어왔던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그녀의 첫 수필집은 195811월 청구출판사에서 발행된 春芹集(춘근집)으로 그녀의 나이 42살 때... 제목에 봄 춘’, ‘미나리 근을 썼으니 봄 미나리라는 뜻이다.

 

이 수필집에는 4부로 나누어 53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독특한 손글씨로 보이는 春芹集이라는 제목 아래 이영도 수필집이라는 활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표지 바탕에는 난초인 듯한 화려한 꽃이 뒤표지까지 이어져 있다.

 

특히 책 하단을 수놓은 강렬한 색감의 그림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화풍인데, 속표지를 보니 제목 글씨를 쓴 사람은 김상옥이었고 표지와 본문을 꾸민 사람은 화가 천경자’였.

 

시인이자 서화 작품전을 개최한 서예가이면서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이 이영도 시인의 첫 번째 수필집 제목 글씨를 써준 것...

 

또 전통적인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이자 수필가였던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천경자 화백이 이영도 시인의 첫 수필집 장정을 맡았던 것이다.

 

이 수필집에는 '코스모스와 더부러'라는 글이 들어 있는데, 누군가를 가리키는 ‘M’이라는 이니셜과 함께 누군가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희망이 담긴 글이다.

 

M은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이영도 시인에게 가을이면 앞뒤 뜰에다 가득 코스모스를 심어 놓고 삽시다. 이것이 끝내 나의 꿈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겠지요?’라며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영도 시인은 어느 조용한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을, 앞뒤 뜰에 온통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아담한 집 한 채를 상상하며 하루를 마치고 코스모스가 만발한 뜰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시절 이야기, 고서(古書) 이야기, 자라나는 아이들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한 쌍의 나비처럼 즐거운 영혼이 안주하는 그러한 황혼을 눈앞에 그려 본다고 쓰면서도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내밀한 속사정을 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에서 ‘M’은 청마 유치환 시인으로 추측이 된다.

 

시인이 60세가 되던 197635일 그녀는 그동안 써서 모은 시조 원고를 들고 당대 최고의 시조 시인이자 선배였던 노산 선생을 찾아가 친히 서문을 부탁한다.

 

함께 점심 식사까지 나누고 돌아간 시인은 그날 밤, 정확하게는 1976360시가 막 지난 무렵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다시인의 장례식은 그해 38일 문인장으로 치러졌는데, 당시 장례위원장은 노산 이은상 시인이었다.

 

그리고 시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지만, 차마 뿌리지는 못하고 시인의 고향인 청도읍 어목산(魚目山)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