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예술 잡학

마 레이니, 블루스의 어머니가 된 여인.

화별마 2023. 8. 3. 13:39

마 레이니 앨범 사진

마 레이니, 블루스의 어머니가 된 여인.

 

마 레이니는 미국 블루스 초창기에 공연과 음반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전설적인 가수로 블루스 아티스트는 물론 후대 미국 대중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그녀는 1920~1930년대를 주름잡았던 블루스 가수 베시 스미스에게 노래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한데, 불같은 성격과 거친 무대 매너 등이 그녀의 캐릭터... 그리고 남녀 모두를 사랑한 바이섹슈얼... 그래서 블랙 퀴어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나 사생활에서나 거침이 없었던 그녀는 1925년 시카고 자택에서 여성들만 참석하는 섹스파티를 벌였다가 체포된 적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 가사에 남성들의 폭력, 특히 가정폭력 문제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는데, ‘슬립 토킹 블루스에서는 잠꼬대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남편을 죽여버리겠다고 했고, ‘블랙 아이 블루스에서는 남자에게 맞으며 살아가는 미스 낸시란 여자의 사연이 등장한다그러나 낸시는 얻어맞은 후 똑바로 일어서서 이렇게 말해. 잘 봐. 조만간 내가 너를 잡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미국 정치학자이자 작가인 앤절라 데이비스는 음악전문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여성 블루스 가수들은 남성폭력과 가정폭력 문제들을 어두운 그늘로부터 꺼내 페미니스트 도래를 시사했다고 평가했다. 마 레이니가 미국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사실 마 레이니의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불명확하다. 18829월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고 1886년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 이름은 거트루드 프리제트... 10대 때부터 춤과 노래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 보드빌 극단과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보드빌은 1800년대 중반 미국 백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민스트럴 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스트럴이란 얼굴을 검게 칠한 블랙페이스의 백인 연기자들이 춤과 노래, 연기로 흑인을 흉내 내는 쇼였다. 1800년대 말에 인기가 시들해지자 더 세련된 보드빌로 발전했다.

 

하지만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고 흑인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민스트럴 쇼는 인종차별 문제로 비판을 받으며 사라진다.

 

마 레이니가 블루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 무렵... 1902년 미주리에서 우연히 블루스 음악을 들은 것이 계기였다.

 

한 여성 가수가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사랑과 이별의 아픔에 관한 노래에 완전히 반해 버렸고 이후 마 레이니는 공연에서 본격적으로 블루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1904년 윌리엄 레이니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과 밴드를 만들어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바로 이때 베시 스미스를 만나 함께 공연했다그리고 1916년 남편과 별거하게 된 그녀는 또 다른 밴드를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23, 마 레이니는 음반사 파라마운트와 음반계약, 1923~1927년 사이에 약 100여 곡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문샤인 블루스’ ‘시 시 라이더’ ‘트러스트 노 맨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리고 1927년에는 마 레이니의 블랙 보텀이란 음반을 내놓았다.

 

검은 궁둥이란 의미의 블랙 보텀은 마 레이니의 최대 히트곡 제목이자 1920년대에 흑인은 물론 백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춤의 이름이다.

 

사내들 들어보시오. 여러분들에게 최고로 멋진 검은 궁둥이를 보여줄게. 남쪽 앨라배마에 친구 한 명이 있어. 사람들은 춤추는 새미라고 불렀지춤추면 다들 미쳐. 검은 궁둥이가 들썩이고 유대인 애기가 깡충거리지.. 이제 내 검은 궁둥이를 보여줄게.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러나 파라마운트는 클래식 블루스가 더 이상 패셔너블하지 않다고 그녀와의 음반계약을 종료해 버렸다. 마 레이니는 1930년대 초반까지 무대공연을 계속했다1935년에 은퇴를 선언하고 콜럼버스로 돌아가 공연장 두 곳을 경영하던 그녀는 1939122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뉴욕타임스는 20196, 마 레이니의 부고 기사를 뒤늦게 게재했는데, 80년 전 고인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보았던 이 신문은 마 레이니에 대해 보드빌과 진짜 남부 흑인 민중음악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최초의 엔터테이너였다고 격찬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관능적인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흑인 노동자들이 흥겹게 궁둥이를 흔들고 춤추면서 노동과 차별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잊으려는 심정이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