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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자, 한국 최초의 섹시 댄스 가수.

화별마 2023. 7. 30. 09:05

가수 김추자 사진

김추자, 한국 최초의 섹시 댄스 가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는데,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다.

 

치마와 머리의 길이까지 통제 대상이던 그 시절, 그녀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역할을 했다.

 

꽉 조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으며 광기까지 내비치던 그녀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계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또 끓어오르듯 내뱉다가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 씨와 결혼한 그녀는 무대와 신문,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녀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고...

 

서로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조관우의 리메이크곡으로 다시 알려진 그녀의 빅히트 곡, ‘님은 먼 곳에1970년 동양 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는데, 작가는 유호 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사실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거절하면서 그녀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되었다고...

 

1969, 데뷔 앨범 늦기 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로 각종 가요 상을 휩쓴 그녀는 대 스타가 된다. 그녀는 당시 신중현 씨의 덩키스 멤버로 그녀가 히트시킨 대부분의 노래들을 신중현 씨가 작곡했다.

 

그 후, ‘님은 먼 곳에는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지만, 그녀의 음색은 흉내 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했고 리듬이 맞지 않아 거절했던 패티 김도 나중에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싣기도 했다.

 

이 노래는 그녀가 어딘가로 여행 떠나 있었을 때,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번 정도 연습하고 바로 녹음한 노래...

 

그녀는 춘천여고 재학 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서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을 하는데,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것...

 

그녀가 데뷔한 1969년대는 베트남 전쟁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과 히피 문화가 전 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음악평론가들은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소울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녀를 두고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도 가수가 없다고 극찬을 했다.

 

그녀는 1951, 춘천의 딸 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나 춘천여중과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 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녀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 노래 학원 등을 다니며 자신의 를 가다듬고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도 활동했다.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그녀는 공부, 노래, , 운동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하는 바람에 춘천 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

 

그녀가 신중현 사단에 들어간 것은 신중현의 매니저이던 맹승호 씨가 형부와 잘 아는 사이로 그 사람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 가요 음반 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도 그녀였는데,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마스터링 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서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으로 만들어서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 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고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1975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녀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