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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오나시스 만나 무대를 버린 프리마돈나.

화별마 2023. 7. 16. 13:41

마리아 칼리스 사진

마리아 칼라스, 오나시스 만나 무대를 버린 프리마돈나.

 

자주 가는 음악 블로그에 가서 노래를 들으려는데, 블로그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O Mio Babbino Caro’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었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오페라의 역사는 칼라스 이전과 칼라스 이후로 나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음영이 짙은 목소리, 메조소프라노부터 콜로라투라까지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 등, 그녀의 위력은 그만큼 대단했는데, 그녀가 산 삶의 역정 역시 극적이었다.

 

1923, 그녀는 미국으로 이주한 그리스 출신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일찍 죽은 아들을 대신할 사내아이를 원했던 그녀의 부모는 우량아로 태어난 딸의 출생에 실망, 그녀에게 살가운 정을 주지 않았다고...

 

더구나 근시로 인해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비만이기까지 했던 그녀는 날씬하고 예쁜 언니를 둔 덕에 미운 오리처럼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가 12살이 되던 해,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노래 경연 대회에 출전, 발군의 실력으로 1등을 하면서 음악적 재능을 드러낸다.

 

그 후, 부모가 이혼하면서 그리스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원래 배우가 꿈이었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도움으로 아테네의 국립 음악원에 들어가서 당시 프리마돈나였던 엘비라 데 히달고를 만나 수준 높은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고, 1940년 그녀가 18살 되던 해, 주페의 오페레타 보카치오로 데뷔한다.

 

그렇게 그리스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마리아 칼라스는 1945, 미국 뉴욕으로 다시 건너가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하지만, 당시 90kg를 육박하는 과체중으로 여러 작품을 놓치게 되고 계약한 작품의 기획사가 망하는 바람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47,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라 지오콘다의 주연을 맡으면서 그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고, ‘라 지오콘다이후,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아이다’, ‘노르마등의 공연을 거친 그녀는 어느덧 '세기의 소프라노'로 이름 날린다.

 

그리고 1947, 오페라를 사랑하는 나이 많은 사업가 지오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 1949년에 결혼, 매니저가 된 사업가 남편의 도움으로 더 큰 명성을 얻는다.

 

1957, 이렇게 프리마돈나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한 모임에서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게 되는데, 남편까지 초대받은 오나시스의 요트 여행에서 오나시스와 연인 사이가 되면서 헌신적이던 남편을 떠난다.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남편을 버리고 오나시스와 정분이 난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무대마저 버리고 오나시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지만, 1968, 오나시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을 만나 결혼한다. 결국, 오나시스를 재클린에게 빼앗긴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서지만, 19657,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잠정 은퇴한다.

 

이후 1970년대, 미국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녀는, 결국 1974, 일본 삿뽀로 공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그리고 1975, 그녀가 사랑했던 오나시스가 죽자 큰 충격에 빠진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고 파리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77,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자신을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로 만들어준 남편을 버리고 그녀가 선택했던 오나시스... 오나시스 역시 그녀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가버렸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