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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양반행세를 하려면 집이 몇 채?

화별마 2023. 8. 21. 09:04

양반집 사진

조선 시대에 양반행세를 하려면 집이 몇 채?

 

집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지금도 대다수 사람들은 내 집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집의 의미가 투자의 수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집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다가오는데, 그렇다면 조선 시대 양반들에게 집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조선 시대의 귀족, , 재산깨나 있는 양반들은 집을 세 채 정도는 갖고 있어야 양반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우선, 한양에는 ‘경저(京邸)’라고도 부르는 경택(京宅)’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의 조정이 있는 한양에서 벼슬을 하려면 궁궐이 있는 한양에 거주해야 하기에 반드시 한양에 집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경택은 조정에서 공직을 수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크기는 보통 30칸에서 50칸 정도의 규모였고 주로 고향인 지방에도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있었는데, 이를 고향 집이라는 의미의 향제(鄕弟)’라고 불렀다. 이 향제는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한양을 떠나 낙향해서 사는 집...

 

또 하나의 집은 별서(別墅)’였는데, ‘별업(別業)’이라고도 불렀다. 말하자면 지금의 별장 같은 개념의 집으로 계곡물이 흐르는 산자락에 위치하면서 아담한 크기의 정자와 함께 숙박의 공간이 붙어있는 집이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 양반들은 벼슬을 할 때는 경택에서 머물렀고 관직을 물러나서는 향제에서 살았으며 휴식을 위해서는 별서에서 쉬었다.

 

현재, 전남 담양에 남아있는 소쇄원은 우리나라 별서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형태다. 하지만 소쇄원은 작은 정자 하나에 숙소가 딸려 있는 자그마한 별서가 아니라 제법 규모가 큰 장급의 별서다.

 

소쇄원은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떠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풍경이 좋은 무등산 자락에서 평생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이 정원을 건축했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가 담긴 이 정원은 자연과 인공을 잘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이었기에 정원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붙였다.

 

물론 담양의 소쇄원보다 규모가 큰 장원으로 경포대 호수와 소나무 숲, 연꽃이 어우러진 강릉의 선교장도 있다. 또 한양에서는 인왕산 자락의 청풍계 일대가 전부 장동 김 씨들의 장원이었다.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시블과 왕유가 종남산 기슭에다 지은 망천장이나 명나라 시절, 왕헌신이 지은 쑤저우의 졸정원이 이러한 장원의 대표적인 형태다.

 

그 후 점점 조선이 쇠망해 가던 1910년 무렵, 조선 시대 때 정해 놓은 건축 규제가 풀리면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서울 도성의 중심가에는 경택의 편리성과 별서의 분위기를 합쳐놓은 제법 큰 규모의 집들이 들어섰는데, 묘하게 모두 ‘장’자가 붙었다이승만의 도남장과 이화장이 그러했고 김구의 경교장, 박헌영의 혜화장을 비롯, 김규식의 삼청장이 그런 집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집을 포함한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주거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교육과 학력, 건강과 수명, 불평등과 빈곤도 부동산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부동산에 울고 부동산에 웃는 나라, 직업과 노동 소득보다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소득이 불평등의 잣대가 되는 사회...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부동산 계급사회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