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사전/역사 잡학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화별마 2023. 9. 22. 10:03

조선왕조실록 이미지

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조선 시대에 편찬한 주요 책들은 편찬이 완료되면 왕에게 바쳤지만, 실록은 예외였다총재관이 완성 여부만 왕에게 보고한 후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다음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했던 것...

 

만약 왕의 열람을 허용할 경우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찬된 실록은 봉안 의식을 치른 후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실록을 보관했는데,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중종 때의 기록을 보면 관청의 노비들이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 사고에 화재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사고는 여전히 지방의 중심지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자 조정에서도 안일하게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특히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된 중심지에 사고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왜군의 주요 침입 경로인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어 소실되었다.

 

다행히 전주 사고에 소장된 실록만이 사고 참봉인 오희길과 전주 지역 유생 손홍록과 안의 같은 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방의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수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실록을 여러 곳에 분산 보관했기에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결국, 당시에는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 험준한 산지를 골라 사고를 설치하게 된 것...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고는 5 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였다.

 

물론 이들은 지역별 안배를 고려해서 험준한 산지에 사고를 배치했지만, 묘향산 사고는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고 강화의 마니산 사고는 1660(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이후 조선 후기 지방의 4대 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고 주변에는 수호 사찰을 두어 사고를 안전하게 지키게 했다. 강화도의 전등사(정족산 사고), 무주의 안국사(적상산 사고), 봉화의 각화사(태백산 사고), 평창의 월정사(오대산 사고)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사찰...

 

지금까지 우리가 실록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은, 분산 보관이라는 원칙을 지키고 가장 안전한 산간 지역에 실록을 보관한 선조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