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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었을까?

화별마 2023. 9. 24. 09:51

규장각 이미지

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왕조의 중흥과 문화 중흥의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고 있는 정조 시대...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시대가 되기까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는데, 무엇보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의 불안한 위치 때문이었다.

 

일찍이 정치의 냉엄함을 뼈저리게 경험한 정조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주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치적 역량을 모은다.

 

이를 위해 탕평(蕩平)’정학(正學)’의 이념을 왕의 입장에서 해석한 성왕론(聖王論)’이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한다.

 

정조의 성왕론은 왕을 정치의 핵심 주체로 보는 것으로, 붕당(朋黨)이 공론 형성과 관련해서 원래의 기능을 상실, 각 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위 조직으로 전락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정조는 자신을 성인이 아닌 정치와 뗄 수 없는 정치가, 곧 성왕으로 이해하면서 중국의 성인 군주인 요, , 우를 모범으로 삼았다.

 

이런 정조의 생각은 왕 중심의 개혁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1798년 정조는 자신의 호를 온 냇가에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의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정한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 제일 먼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부터 정비하기 시작한다. 특히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누구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던 홍국영을 권력을 휘두르며 파벌을 만든다며 내쳤다.

 

물론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외가도 예외일 수 없었는데, 당시 막강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외증조부 홍인한을 사사하고 그를 따르던 많은 주변 인물도 극형에 처한다.

 

그리고 즉위 과정에서 여러 번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을 지켜줄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한다.

 

또 왕권 강화와 함께 학문을 장려하고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했는데, 정조의 이런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세조 때에도 양성지가 규장각 설립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숙종 때 종정시(宗正寺)의 작은 건물에 규장각이라는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이 직접 쓴 글인 어제(御製)나 어필(御筆) 등을 보관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처소로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에는 창덕궁으로 옮긴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이 주합루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고 해서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와 어필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의 주요 전적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을 정조가 즉위하자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는 의미인 계지술사(繼志述事)’를 명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런 명분 아래 정조를 뒷받침할 정치세력과 문화정책의 추진 기관으로 규장각에 힘이 실리며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정치 기관이 된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젊고, 참신하며 능력 있는 인재들을 규장각으로 불러 모았다.

 

그때 정약용을 비롯해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규장각에서 연구하면서 정조의 개혁정치에 우군이 된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전통을 본받아 새것을 창출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규장각 설립 취지에 가장 적합한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