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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조선 시대에 한 그릇 값은 얼마였을까?

화별마 2023. 11. 15. 11:41

비빔밥 사진

비빔밥, 조선 시대에 한 그릇 값은 얼마였을까?

 

조선 시대에는 비빔밥을 골동반(汨董飯, 骨董飯)’이라고 불렀는데,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어지러울 골이고 ()’감독할 동으로 동에 초두머리(, )가 들어가 있어 여러 가지 채소 등을 넣어 어지러울 정도로 골고루 섞어 먹는 밥이라는 의미였다.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도 골동의 유래가 중국으로 양쯔강 사람들이 반유반(盤遊飯)’이라는 음식을 잘 만드는데, 젓과 포, , 구운 고기 등을 밥에 넣은 것이 골동(骨董)’이며 오래전부터 있던 음식이라고 적고 있다.

 

또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그 전해에 먹던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민간은 물론 궁중에서도 비빔밥을 해 먹었다고...

 

문헌상 가장 먼저 비빔밥이 등장하는 책은 시의전서로 상에 비빔밥을 잡탕국과 함께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음식 전문가에 의하면 이미 삼국 시대부터 산신제나 동제, 시제(時祭) 등을 지내면서 제사에 제물로 올린 음식을 신과 인간이 함께 먹는 전통인 신인공식(神人共食)’에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음복하며 비빔밥이 탄생했다고 추정한다.

 

즉 산이나 동네 어귀에서 제사를 지내고 상을 펼치기에는 그렇고 그릇도 넉넉하지 않아 그릇 하나에 나물과 적 등을 함께 담아 음복하면서 비빔밥이 시작되었다는 것...

 

이 외에도 조선 인조 때 형조판서와 의금부 판사 등을 지낸 문신 박동량의 문집 ‘기재잡기’에도 생선과 채소를 함께 섞어 비빔밥을 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고종 때 1891년부터 1911년까지의 개인 일기를 남긴 중인 지규식의 ‘하재일기’에는 초청받은 이웃 노인 대여섯 명이 남산 기슭 솔숲에서 대접받은 음식 중에 비빔밥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친척의 제사에 참석하여 비빔밥을 먹었다가 탈이 나서 화장실을 예닐곱 번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비빔밥의 가격은 얼마였을까?

 

다산 정약용과 교류했던 문신 이학규의 낙하생집(洛下生藁)’에 그 가격이 나와 있는데, 양반의 허리띠값이 부자가 여름에 먹는 골동반 한 그릇과 같은 600전에 이른다고 알려주고 있다.

 

당시 600전이었던 허리띠의 값과 골동반의 값이 같다는 것을 보면 그때도 비빔밥은 고급 음식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