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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와 엄토미. 어떻게 댄스홀 열풍을 불러왔을까?

화별마 2024. 1. 9. 12:04

댄스 홀 이미지

김광수와 엄토미. 어떻게 댄스홀 열풍을 불러왔을까?

 

1937년 초, 잡지 삼천리에 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공개 청원의 글이 실렸는데, 레코드사 문예부장과 배우, 다방 마담, 기생 등 당대의 모던 남녀들이 연명해서 올린 내용은 서울에 딴스 홀을 허락하라는 것...

 

물론 단칼에 일축되어 식민 통치와 총력전 체제였던 당시 일어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구미(歐美)식 가무(歌舞) 공간에 대한 욕망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피폐해진 곳곳을 열심히 복구하던 때에도 발생했는데, 하나는 1954년 한 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사교댄스와 성 윤리에 대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이 소설은 단행본 출간과 영화화로 이어지며 최고의 흥행을 한다.

 

다른 하나는 1955년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으로 해군 장교를 사칭,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사건...

 

그는 춤만 추고 나면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고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희대의 무죄 판결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이 두 사건은 선정주의 보도의 논란과 성 윤리의 아노미 현상을 빼면 사교댄스와 댄스홀 열풍이 배경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1950년대 춤바람과 댄스홀 붐이 어느 정도였길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까?

 

해방 직후,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과 조지야백화점(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대규모 고급 댄스홀이 문을 연다.

 

이처럼 1950년대 댄스홀이 우후죽순 들어서며 댄스홀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는데, 조금 과장을 하자면 무허가 교습소에서 트레이닝을 마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이때 댄스홀을 뜨겁게 달군 음악은 어떤 음악이었을까? 신나면서도 격조 있는 음악, 즉 재즈와 스탠더드 팝, 라틴 음악이 주류였다고... 

 

이는 이국적 가사와 정서가 등장하는 가요와 함께 탱고, 맘보, 차차차 등 라틴 팝송이 유행하던 당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김광수와 엄토미가 주역으로 떠오르는데, 김광수는 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외삼촌이자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그는 일제 강점기 말 일본에서 사쿠라이 기요시 탱고 밴드에서 활동했고 1940년대 후반부터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후에는 한국방송국과 문화방송국의 악단장을 역임하며 한국 경음악 계에 큰 업적을 남긴다.

 

라틴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던 김광수 악단을 거친 이들로는 연주자 노갑동, 최상룡, 김인배, 이봉조 등과 가수 현미, 이금희, 배호 등이 있다.

 

특히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자인 엄토미(본명 엄재욱)1940년대 말 이후 연주자와 악단 리더로 명성을 얻은 인물...

 

김광수와 마찬가지로 작곡과 영화음악, 방송국 악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엄토미는 부산 피난 시절 김광수, 박춘석과 함께 올스타 쇼활동을 했다.

 

김광수 악단이 라틴 음악의 선두 주자였다면, 엄토미 악단은 재즈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다또 엄토미는 영화배우 엄앵란의 숙부로 은성 살롱에서 무명의 신중현을 무대에 올린 인물이다.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이 당시 하늘 같은 분이었다는 말로 엄토미와 김광수를 회고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은 당시 음악계의 대단한 인물이 틀림없다.

 

마르카스를 들고 악단을 지휘하던 김광수의 모습과 잘생긴 외모로 색소폰을 연주하던 엄토미의 모습... 그리고 이 같은 전속 악단의 반주에 맞춰 양복을 말쑥하게 입은 남성과 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여성이 노래 부르며 당시 댄스홀 열풍을 불러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