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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배경은 무엇이고 왜 발생했을까?

화별마 2023. 8. 14. 17:00

제주 4.3사건 이미지

제주 4.3 사건, 배경은 무엇이고 왜 발생했을까?

 

어떤 사건의 경우, 배경이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뒤섞여 있어 이것 때문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제주 4.3 사건이 그렇다.

 

그렇지만 민족적 비극으로 기록되는 이런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제주 4.3 사건의 배경은 무엇이고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194731일에 있었던 ‘3·1절 발포사건인데, 당시 좌익계열의 남로당이 3·1절을 경축한다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도로 제주읍을 비롯하여 도내 각 면 소재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동원, 집회한 뒤, 반정부 데모를 감행하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당하면서...

 

문제는 희생자가 이 집회를 구경하던 일반 주민으로 알려지면서 폭동으로 이어진 것...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3.1절 발포사건을 빌미로 일으킨 ‘3·10 총파업도 그중 하나...

 

‘3·10 총파업은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당시 제주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이 파업에 대해 미 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처음에는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그 후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무게를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한다.

 

따라서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하고 조병옥 경무부장을 현지에 급파, 충남 및 전남 경찰응원대의 지원을 받아 총파업을 빠르게 진압했다.

 

그러나 이 진압 후 500여 명이 체포되고 제주도 일선 지서에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주도는 급박한 위기상황으로 돌변한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상태...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정 당국에 등을 돌린 민심을 이용, 조직을 지키고 당면했던 5·10 선거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194843일 새벽 2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3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당시 남로당원 김달삼의 지휘로 제주경찰서 관내의 7개 지서를 비롯, 모슬포경찰서 관내의 3개 지서 및 서귀포경찰서 관내의 3개 등 13개 지서를 동시에 습격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방화와 약탈 등을 자행한다.

 

초기 미 군정은 이를 폭동 상황으로 보고 경찰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으려고 했지만, 사태가 잘 수습되지 않자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 작전 명령을 내린다.

 

그 후,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측 대표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으나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결렬되고, 미 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 참모 슈 중령을 제주로 파견, 경비대 9연대장을 교체하고 5·10 선거를 추진한다.

 

그러나 5.10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자 미 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 작전과 함께 6.23 재선거를 추진했으나 실패한다.

 

그런 와중에 5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 무장대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소강상태였지만,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 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을 강화했고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에서 느슨한 진압 작전을 전개한다.

 

그러나 선거로 남쪽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도 다른 정권이 세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닌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지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다.

 

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비대 9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며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하는 대대적인 강경 진압 작전을 실시한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해안가 마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 늘어난다.

 

1949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되었고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5.10일 재선거도 무사히 치러지면서 6월 무장대 총책이었던 이덕구도 사살되어 무장대가 사실상 전멸한다. 이때까지 진압 작전에 투입된 경비대 군경도 140명이나 희생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제주도에 비극이 찾아온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 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 되면서 죽음을 당한 것...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된다.

 

예비 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족들은 아직도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도대체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이렇게 제주 4.3 사건은 19549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3·1절 발포사건과 4·3 무장봉기로 촉발된 지 77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미 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이념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