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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 왜 그는 가정폭력을 행사했을까?

화별마 2023. 11. 27. 11:59

시인 김수영 사진

시인 김수영, 왜 그는 가정폭력을 행사했을까?

 

시인 김수영은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 모더니스트이자 참여시인그리고 끊임없이 자유를 노래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4·19 혁명으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1963년에 발표된 죄와 벌이라는 시를 보면 시인 김수영은 길 한복판에서 그의 부인을 우산으로 두들겨 팬다. 그것도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부인 김현경에 의하면 당시 김수영은 술에 만취하면 1년에 두세 번씩 아내에게 사정없는 폭력을 행사했는데, 시인 김수영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었다.

 

시를 살펴보면 길 한복판에서 우산으로 자기 아내를 패는 것도 충분히 못났는데, 그다음이 더 가관이다. 홧김에 아내를 패고 나서 정신을 차린 후 기껏 한다는 생각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나 후회가 아니라 당시 아는 사람이 자신을 보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또 두들겨 맞은 아내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의 체면이 먼저 떠올랐고 또 그보다 버리고 온 우산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1921, 서울 태생인 시인 김수영은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겪으며 살았는데, 일제 식민 치하에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일제의 징집을 피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김수영이 김현경을 처음 만난 것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후로 선린상업학교 전수부(야간)를 졸업한 김수영은 같은 학교 선배인 이종구와 사이가 가까웠다.

 

도 이종구와 같은 집에서 동경 유학 생활을 함께 했는데, 이종구는 동경상대에 다니고 있었고 김수영은 미즈시나 연극 연구소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당시 김수영의 집안은 김수영에게 충분한 돈을 보내지 못하는 처지라 동경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이종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종구가 잘 아는 동생이었던 사람이 훗날 김수영의 아내가 되는 김현경이었다.

 

동경 유학 생활이 끝나자 김수영은 김현경과 사랑에 빠졌고 해방 후 김수영과 김현경은 부부가 되어 한집에 살게 되었고, 김현경은 첫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6·25 전쟁이 터진 것... 서울에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김수영과 그의 가족...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영은 다른 문인들과 함께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끌려간다.

 

후퇴 과정에서 그는 탈출했지만, 유엔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난 후 피난 수도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아내 김현경의 소식을 듣는데, 이때 김현경은 부산에서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었다.

 

한방에 기거하는 이종구와 김현경을 목격했을 때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김수영은 방 안에 있던 김현경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김현경의 말 한마디... ‘그럴 수 없어요.’ 그 충격은 어쩌면 한방에 기거하는 이종구와 김현경을 제 눈으로 처음 확인했을 때 받았던 충격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1년 후, 김현경은 이종구와 헤어지고 김수영에게로 돌아와서 결혼 생활은 김수영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다.

 

이런 상황이 가족의 재결합이 될 수는 있었지만, 두 사람이 그 상황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이 사건은 김수영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흉터를 남겼고 시인 김수영이 김현경에게 주기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