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왜 스스로 ‘간서치(看書癡)’라고 했을까?
18세기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이덕무는 소위 ‘백탑파’ 중 한 사람으로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백탑’이라 불렀는데, 그 근처 동네에 살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지식인을 ‘백탑파’라고 불렀다.
그들 중 연배가 높고 스승 격인 사람들이 바로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이었고, 이덕무는 중진이었으며, 후학으로는 초정 박제가, 영재 유득공과 척재 이서구, 그리고 야뇌 백동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역사, 지리, 문화, 풍속, 인물은 물론 음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공유하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청을 다녀온 후 청나라 문물에 심취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는 청 문물 도입과 상공업의 진흥을 주장, 이들을 초정 박제가의 저서 ‘북학의’ 이름을 따서 ‘북학파’라고도 불렀다.
책을 무척 사랑했던 이덕무가 읽은 책은 2만여 권... 이 숫자는 매일 1권씩 읽는다고 해도 54년이 걸리는 엄청난 분량이다.
하지만 서얼 집안이었던 그는 뼈에 사무치게 가난해서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가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던 ‘맹자’ 7권을 200전에 팔아 식구들 끼니를 먹일 정도...
그 말을 들은 유득공은 아끼던 ‘좌씨전’을 팔아 친구에게 막걸리를 받아다 주며 자신들을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독서광이었던 그는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에 피가 터질 지경인데도 책을 빌려다 읽었다.
또 돈이 없어 종이를 아끼기 위해 작은 글자로 필사한 책이 수백 권에 달했는데, 그 자획 하나하나가 바르고 정성스러웠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은 책의 가치가 없다고 해서 서로 앞을 다투어 그에게 책을 빌려주었다고...
그 후 규장각 검서관 중 한 사람이었던 이덕무(李德懋)는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해서 스스로 ‘간서치(看書癡)’라고 했다. 이런 이덕무를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는 그가 관직에 있던 15년 동안 무려 520여 차례 그를 위한 하사품을 내렸다.
또 그가 세상을 떠나자 특별히 그의 아들 이규경을 검서관에 특채해서 국가 예산으로 이덕무의 유고집 ‘청장관서’를 간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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