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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16세기 카리스마를 지닌 선비였던 이유는?

화별마 2023. 11. 17. 12:23

남명 조식 초상화

남명 조식, 16세기 카리스마를 지닌 선비였던 이유는?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으로 영남학파의 거두...

 

1555년 조식은 단성 현감을 제수받은 후 사직 상소문을 올리는데, 당시 사회적 문제점을 날카로운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한다.

 

특히 실질적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해서 수렴청정과 그로 인해 파생된 외척 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다

 

이렇게 남명 조식은 일개 처사였지만, 목숨이 달아날 수 있는 절대군주를 향해 당당하게 직언을 하는 선비였다.

 

당연히 조식의 상소는 조정을 발칵 뒤집어서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과 사관들은 그가 초야에 묻힌 선비라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며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변호, 파문이 가라앉는다.

 

이 상소 사건을 보면 재야 선비 조식의 기개도 그렇고 조식을 옹호한 당시 사관들의 용기 있는 발언과 언로 확보를 강조한 당시 사림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조식은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과 의()는 남명 사상의 핵심으로 을 통한 수양을 토대로 외부의 모순에 맞서 과감하게 실천하는 를 신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의 상징으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의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를 상징하는 칼을 차고 다녔는데, 칼에는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이 의라는 뜻의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를 새겼다.

 

이런 조식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 선비의 모습이 바로 남명 조식의 캐릭터였다.

 

그는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올려 문제점을 지적했고 후학에게는 왜군의 침략에 대비토록 해서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했을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남명 문하에서 여러 의병장이 배출된 것을 보면 그의 실천적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또 남명 조식은 당시 이황과 기대승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이기론을 둘러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가 이론 논쟁을 비판한 것은, 그것이 실제 백성들의 삶에 도움 되지 않고 지식인들이 헛된 이름을 내세우는 데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1세 되던 해 그는 외가인 합천을 떠나 지리산이 보이는 산천재(山天齋)에 마지막 터전을 잡았는데, ‘산천은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묘소 역시 자신의 생가 근처가 아닌 지리산이 보이는 곳에 잡아 앞으로는 덕천강이 흐르고 뒤로는 천왕봉을 비롯, 지리산 봉우리들이 우뚝 솟은 곳으로 남명 조식은 예로부터 삼신산이라 불리던 지리산을 닮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