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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과 보신탕, 왜 중국 진나라에서 유래가 된 것일까?

화별마 2023. 8. 13. 11:48

복날 이미지

복날과 보신탕, 왜 중국 진나라에서 유래가 된 것일까?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복날과 보신탕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복날에 관한 기록을 두 군데에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진(秦)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진본기고 다른 하나는 12 제후국의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정리한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진본기를 보면 덕공 2, 처음 복날을 정해 개로 벌레의 피해를 막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고, 십이제후연표에는 덕공 2, 처음 복날을 정해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개고기를 찢어 도성 사대문에 걸어 벌레가 나쁜 기운을 옮기는 것을 막았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왜 복날의 유래가 기원전 676년 진나라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왜 개고기를 제물로 사용했던 걸까?

 

진나라는 중국 서북부 간쑤 성에서 출발하는데, 기원전 10세기 주나라 효왕을 모시던 비자가 말을 잘 키워서 땅을 하사 받고 대부가 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오랑캐 견융에 쫓기자 제후였던 양공은 왕의 지시로 지금의 산시성 서북쪽의 서융을 정복한 후 그 땅을 차지했고 이 땅이 진나라의 시작이다.

 

그러다 기원전 677년 덕공 원년에 수도를 옹성으로 옮긴 이듬해 처음으로 복날을 정해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낸 것... 이는 중원의 전통이 아닌 서역 오랑캐의 풍속이라는 의미다이렇게 복날의 유래는 서융의 풍속을 이은 진나라가 진시황 때 중원을 통일하면서 서융의 풍속이 중국과 동북아시아로 전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양에도 복날과 비슷한 도그 데이(Dog Days)’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에 73일부터 811일까지 약 40일의 무더운 기간을 그렇게 불렀다.

 

동양의 삼복더위가 7월 초복에서 8월 말복까지 30일 정도이지만, 서양의 도그 데이는 삼복더위보다 길지만, 계산법의 차이일 뿐 실제로 더운 기간을 따지면 동서양이 거의 비슷하다.

 

고대 서양인들은 7월과 8월의 무더위를 시리우스 때문이라고 믿었는데, 시리우스는 큰 개 별자리의 중심에 있는 별... 영어로는 개 별(Dog Star)’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하늘의 이리라는 의미의 천랑성(天狼星)이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시리우스의 분노가 더해져 7월과 8월의 지독한 더위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 서양인들도 시리우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동서양이 많이 닮아있다.

 

그렇다면 왜 개로 제사를 지냈을까? 복날 제사의 목적은 개로 나쁜 기운을 막고자 했던 것... 그리고 나쁜 기운의 정체는 사기에 나오는 ()’라는 한자로 이는 뱃속 벌레라는 뜻... 즉 몸속에 독을 뿜어 질병을 일으키는 벌레로 여름철에 걸리기 쉬운 질병인 식중독이나 전염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에는 개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가축이었다. 현재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인 바칠 헌()’을 보면 솥 권()’개 견()’이 합쳐진 글자다. 풀이하면 개를 솥에 삶는다는 의미로 이 한자가 바치다’, ‘드리다의미가 된 것은, 고대 제사의 제물이 솥에 삶은 개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배경은 개가 일부 서융 부족에게는 토템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것... 그래서 중국에서는 중원 밖의 이민족을 북적이라고 불렀는데, 북적은 ‘이리가 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토템 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는 목적이 하늘과 조상님께 복을 빌어 화를 막기 위해서인 만큼 복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낼 때 조상님과 관련된 가축이 적격이다. 그래서 개를 잡아 성문에 걸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춘추시대 전후 중국에서는 제물로 바친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복을 받는다고 해서 음복이라고 했고 그 음식이 보신탕이었다.

 

또 유교 경전 예기에서는 개의 용도를 셋으로 구분했는데, 하나는 집을 지키는 용도(狩犬), 또 하나는 밭을 지키는 용도(田犬), 그리고 식용(食犬)이었다당시 사람들은 경제 수준에 따라 부자들은 소를 잡아먹고 중산층에서는 양과 개를 먹었으며 가난한 사람은 닭과 돼지고기를 먹었다.

 

이런 풍습이 중국 북방에서 보신탕이 사라진 때는 대략 6세기 무렵... 개 식용을 기피한 유목민의 영향이었다이때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가 중원을 지배했고, 한족의 송나라는 남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이후에도 유목민인 몽골의 원나라가, 한족의 명나라 이후에는 여진족의 청나라가 세워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