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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쟁 같은 맛’, 슬픈 생존 그리고 허기 그 이상을 채운 음식 맛.

화별마 2023. 8. 12. 09:48

소설 전쟁같은 맛 표지

소설 전쟁 같은 맛’, 슬픈 생존 그리고 허기 그 이상을 채운 음식 맛.

 

일제 식민지 시절 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부모의 딸로 그곳에서 태어나 4살 때 해방되자 부산으로 돌아온 군자라는 여인... 그녀는 이어진 6.25 전쟁으로 오빠와 아버지를 잃고 홀로 집에 남게 된다.

 

홀로 남은 그녀를 살려준 것은 엄마가 마당에 묻어 둔 김치와 찬장에 남겨진 쌀... 그 김치 덕분에 3번의 계절이 지날 때까지 살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부산에서 살길이 막막했던 그녀는 결국 기지촌에 발을 들인다. 거기에서 선원이었던 나이 많은 백인 남자를 만나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난다.

 

당시 이민자와 아시아인이 한 명도 없던 마을에 정착한 그녀는 백인 중심의 문화에 눌려 지낸다. 이들 가족의 삶 자체가 마을의 스캔들일 정도로 백인들은 이민자의 정체성 따위는 무시했고 미국인으로의 동화를 강요했다.

 

그런 취급이 부당했지만, 대부분의 이민자가 그랬듯 그녀는 백인 문화에 동화되는 것처럼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집요하게 유지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그녀의 혼혈 딸에게 한 아이가 너희 엄마가 전쟁 신부였냐고 말하자 딸은 엄마에게 묻지만, 그냥 얼버무린 그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상쇄하는 일이 자식들을 성공시키는 일이라 굳게 믿었다. 좋은 직장은 이민 여성이 취업하기 불가능해서 야간에만 근무하는 직장을 11년간 다녔고 근무가 끝난 후에도 들에 나가 블랙베리와 버섯 등을 채취해서 이를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에 서너 시간 자면서도 아이들의 식사에는 언제나 정성이었던 그녀... 그녀는 빠르게 익힌 미국 요리를 솜씨 좋게 식탁에 차려내면서도 한국 음식인 김치 역시 빼놓지 않고 식탁에 올린다.

 

그녀만의 스타일인 퓨전 메뉴와 한국인의 음식 정서인 원 스푼. 노 러브’(한 번만 주면 정 없다)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녀에게 음식은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고 놓을 수 없는 희망...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45살의 그녀가 딸이 15살 때부터 이상해진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며 편집증을 보이기 시작한 것...

 

그녀는 끊임없이 혼잣말하며 누군지 알 수 없는 옥희와 대화를 했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옥희의 정체는 누구일까?

 

딸이 그런 엄마의 광기를 이해하고 싶던 어느 날 올케로부터 그녀가 부산에서 매춘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딸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전쟁 신부'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젊은 엄마에 비해 너무 늙은 아버지와의 결혼 그리고 기억의 한 편에 남아 있던 아버지의 폭력도 떠올린다.

 

딸은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엄마의 조바심, 이 모든 것이 엄마의 광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딸은 엄마가 11년간 밤에 일했던 셔헤일리스 그린힐 소년원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많은 성폭력이 일어났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 침묵을 강요당하고 혹은 성폭력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기억이 부산 기지촌에서의 과거와 맞물려 엄마의 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에게 밖은 위험한 곳이었다. 김치와 밥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먹던 식사도 거부하자 딸은 엄마를 위해 요리를 한다. 엄마를 살리기 위해...

 

엄마가 가르쳐주는 생전 처음 해보는 생태찌개를 엄마와 나누어 먹으며 모녀는 서서히 회복해 간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하던 엄마가 200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딸은 김치를 먹기 시작했고, 미국에 와서 버려진 채 미친 사람이나 홈리스가 되어 도시를 떠돈 전쟁 신부에 비해 불행한 삶을 산 경우는 아니었지만, 엄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딸이 엄마를 위해 쓴 소설이 바로 전쟁 같은 맛이다. 엄마가 식욕을 잃고 라면과 과일 통조림만 먹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을 때 올케가 분유를 드렸더니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난다며 전쟁 같은 맛이라고 한데서 모티브가 되었다.

 

6.25 전쟁 후 미국이 식량 원조로 준 분유를 먹고 유당 불내증으로 복통과 설사로 고생한 후유증을 조현병을 앓던 엄마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것...

 

6·25 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술이나 성()을 파는 서비스업에 종사한 한국 여성은 약 100만 명에 이르고 10만여 명은 미군과 결혼해서 한국을 떠났다. 당시 정부가 사실상 기지촌을 운영했고 혼혈아가 태어나면 해외 입양을 권장하던 시절이었다.

 

딸은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 단순한 망명 상태가 아닌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와 미국에서 삶을 꾸려나가겠다는 의지, 음식을 만들며 생존하려고 한 방법까지...

 

그녀의 딸인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가 목소리를 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말한 이 소설은 2021년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호평이 쏟아졌다. 시사주간지 타임에서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고 2022년에는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