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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홍귀달이 연산군에게 정 맞다.

화별마 2023. 7. 23. 09:18

연산군 이미지

모난 홍귀달이 연산군에게 정 맞다.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하거나 강직하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는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을 맞는 일이 모난 개인의 탓일 수도 있지만, 그 모난 돌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나 주변 사람, 혹은 지도자의 좁은 마음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칙을 고수하는 모난 돌 같은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면, 그 시대 지도자의 포용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때는 연산군 시절, 스스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은 홍귀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세조 때 과거에 급제, 관직에 오른 이래 성종 때에는 대사성, 대제학,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거쳤고, 문장력이 뛰어나 중신(重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신하 홍귀달은 거북한 존재... 연산군 10221,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명이 내렸는데, 자신이 데리고 있던 홍귀달의 아픈 손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경기 관찰사였던 홍귀달은 병이 있어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명하셔도 들어갈 수가 없다고 아뢰고 자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므로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겠다고 한다.

 

연산군은 병이 심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 말을 임금을 능멸한 것으로 생각, 분노가 폭발해서 홍귀달을 국문하도록 명령한다. 또 공손치 못한 말을 그대로 보고한 승지까지 국문하게 했고, 성에 차지 않아 심문이 느리다며 홍귀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웠느냐고 의금부 당상까지 심하게 독촉했다.

 

홍귀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웠냐고 묻는 것을 보면 당시 연산군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음을 알 수 있지만, 결국 홍귀달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그렇게 하고도 화가 덜 풀렸는지, 연산군은 경기도 양근(楊根)까지 압송해 간 홍귀달을 다시 끌고 와서 곤장까지 쳤다.

 

그전부터 2품 이상의 신하를 신문할 때는 형장을 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이는 국가의 원로를 대접하는 기본 예의였지만,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를 뽑겠다고 재상에게 모욕적인 형벌을 가했고. 공포정치를 통해 세상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것...

 

그러나 홍귀달의 귀양은 서막일 뿐,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를 왕비로 추숭 하다 폐비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내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다.

 

이를 계기로 연산군은 조정 신하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승지였던 홍귀달도 도성으로 압송 중 함경도 단천에서 사형에 처해진다..

 

당시 사관은 연산군이 유독 홍귀달에게 가혹하게 대한 진짜 이유로 홍귀달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 왕이 총애하던 장녹수를 통해 누군가 왕에게 청탁했는데, 홍귀달이 들어주지 않아서 다른 일로 귀양을 보냈다가 이때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잘 달리는 말이 발길질도 잘한다는 옛말이 있다. 강직하고 소신 있는 사람은 능력도 뛰어나다는 말인데,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홍귀달과 같은 모난 돌도 필요한 법... 그리고 그 모난 돌을 포용하는 정도가 그 사회의 성숙도와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