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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중국 푸젠성의 기근을 해결한 구황식물.

화별마 2023. 8. 29. 10:11

고구마 사진

고구마, 중국 푸젠성의 기근을 해결한 구황식물.

 

중국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것은 청나라 때... 18세기 중반 건륭제는 중국 땅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신장, 위구르 지역을 합병한다.

 

신장(新疆)이라는 지역 이름은 청나라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했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또 중국 총면적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티베트 역시 강희제 때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아왔고 1951년 중국에 합병되면서 티베트(西藏) 자치구가 되었다.

 

청나라 때 중국이 지금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처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도 청나라 무렵이다.

 

그리고 청나라 때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배경에 등장하는 것이 고구마다.

 

고구마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명나라 말기 1593년 무렵으로 청나라 천쓰위안이 쓴 금서전습록에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말, 명나라 신종 때 중국 남쪽 푸젠성에 진진용(陳振龍)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중인 집안이라 벼슬길이 쉽지 않아 일찌감치 공부를 접고 장삿길에 나선다.

 

대만과 마주 보고 있는 푸젠성은 명나라 때부터 바다를 통해 해외로 나가는 관문... 따라서 그는 당시 여송국으로 알려진 필리핀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어느 날, 그는 고향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작물을 발견했다. 생김새는 마 혹은 토란과 비슷했지만,, 맛은 달착지근해서 입맛에 맞았고 두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든든했다.

 

거기에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서 고향으로 가져가서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구마를 필리핀 영토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고구마를 전파한 스페인 관리들이 종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진진용은 스페인 관리의 눈을 피해 고구마 줄기를 밧줄처럼 엮은 후 그 속에다 고구마 종자를 감추어 가지고 온다.

 

일주일 동안의 항해를 거쳐 고향 푸젠성으로 무사히 돌아온 그는 고구마를 심었는데. 푸젠성의 기후와 토양이 잘 맞았는지 고구마는 잘 자랐다. 이때가 1593년 명나라 신종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푸젠성에 큰 기근이 들었다. 이때까지도 진진용이 사는 지역 주변에서만 고구마를 심었을 뿐 푸젠성 전체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푸젠성 성장 김학증(金學曾)이 고구마가 가뭄에도 잘 자란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진진용 집안의 도움으로 고구마 재배법과 고구마 종자를 퍼뜨려 기근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한다.

 

이런 배경으로 푸젠성 일대 사람들은 고구마를 심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준 푸젠 순무 김학증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의 성을 따서 고구마에 금서(金薯)’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 씨의 고구마라는 의미도 되지만 배고픔을 면하게 해준 금처럼 귀한 고구마라는 뜻도 되고 금빛처럼 누런 마라는 삼중의 의미가 고구마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고구마 전래 기록은 1763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조엄의 해사일기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1764618일의 일기에 작년에 고구마를 부산으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