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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화별마 2023. 9. 12. 09:57

포도청 이미지

포도청, 조선 시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조선 시대 포도청은 범죄자를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곳으로 한성과 경기를 좌우로 나누어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두었다.

 

이는 전국에서 들끓었던 도적의 횡포를 막기 위해 성종 2년 임시로 설치했던 포도장제(捕盜將制)가 중종 때 포도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정식 기관이 되었다.

 

포도청에는 최고 책임자로 좌우 포도대장이 각각 1명이 있었고 그 밑에 포도대장의 참모 역할을 하는 종사관을 각각 3명씩 두었다.

 

또 종사관 밑에는 포도부장과 군관과 말단 관속인 포도군사가 있었는데, 흔히 포졸이라고 부르는 말단이 포도군사다.

 

그들의 직속 상사 포도부장과 군관은 포교라고 불렀고 이들은 도적의 예방 및 체포를 위해 야간순찰과 그 밖에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 양반집을 수색하고 여자 도적을 체포하는 다모(茶母)’라는 여자 관비도 있었는데, 포도청의 경우 여성과 관련된 범죄 수사 등에 다모가 참여, 수사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포도청은 서울 일대의 치안 담당을 주된 업무로 하는 일종의 경찰 기구인 셈...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역할을 했다.

 

포도청에서는 절도와 강도는 물론이고 위조 동전 주조, 인삼 밀매, 국경에서의 잡상 행위, 밀도살 등 다양한 범죄와 관련된 일을 조사하고 처리했다.

 

오늘날의 경찰보다 폭넓은 활동을 하다 보니 늘 업무에 시달렸고 서울 도심에서 활동하는 각종 무뢰배, 치한, 강도, 절도범 등을 매일 상대하고 조사하다 보니 확실한 자백을 받기 위해 가혹한 고문과 형장이 다반사였다고...

 

그렇다면 실제 포도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61년에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 우리나라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 천주교 박해로 추방되었다가 1877(고종 14) 다시 잠입, 1878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약 4개월간 포도청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간 리델은 포도청에 수감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01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기록에 따르면 감방 옆에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쓰던 형구를 보관하거나 시신을 임시로 보관하는 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악취를 풍기던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또 포도청에 수감된 죄수는 크게 도둑, 채무 죄수, 천주교 신자로 나누었고 도둑들이 가장 비참한 대접을 받아 이들은 밤낮없이 발에 족쇄를 차고 있어야 했으며 밤에 졸면 포졸들이 몽둥이로 온몸을 후려쳐 깨웠다.

 

리델에 따르면 포도청에는 포교 50여 명이 있었고 그들 밑에 포졸 등 하급 직원과 망나니 등이 있었으며 포졸들이 몽둥이로 죄수를 때려죽여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수형도 포도청 안에서 간단하게 끝냈다고...

 

아울러 민속연구자 김화진이 쓴 한국의 풍토와 인물이라는 책을 보면 포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변장하고 한성부 시내를 순찰했으며 포교와 포졸들 사이에는 고유한 암호가 있어 매일 바꿔가며 사용했다고...

 

예를 들면, ‘밥을 내라(고문하라)’, ‘모양을 내라(잔뜩 묶어라)’, ‘대장으로 모시어라(칼을 채워두어라)’, ‘새벽녘이다(단서를 얻었다)’, ‘미꾸리다(새어 나갔다)’ 등이 있었고 범인과 관련한 은어로는 힘이 없는 놈을 뜻하는 파리’, 억세고 무리를 이룬 경우는 참새라고 했다고...

 

근대 경찰의 뿌리인 파리 경찰청과 런던 경찰청이 1800년대 생겨났지만 조선 시대 포도청은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설치되었다.

 

그 후 1894년 갑오개혁 때 경무청으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