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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왜란이 아니라 ‘임진전쟁’이었다.

화별마 2023. 8. 4. 08:06

임진 전쟁의 이미지

임진왜란, 왜란이 아니라 임진전쟁이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는 물론, 17~20세기 초까지 동양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규모의 전쟁... 그러나 6.25 한국전쟁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컸던 전쟁을 왜란으로 축소해서 기록하고 있다.

 

50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과 당시 최첨단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침략, 조선인만 200만 명이 희생되었지만, 아직도 라는 나라의 난동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용어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가 7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명이 망하고 청()이 중국의 대륙을 차지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판도를 변화시킨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 학술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다.

 

왜란이란 표현은 왜인이 일으킨 난동이라는 의미로 동아시아의 3국이 싸운 국제전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땅의 백성과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영화 '명량'에서도 알 수 있듯, 또 당시 이순신 장군의 깊은 고뇌를 보아도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 나라가 일으킨 난이 아니라 분명, 전쟁이다.

 

이렇듯 전쟁을 왜란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은 당시 조선의 권력자와 그 권력 계승자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당시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무능했던 조선의 왕과 권력층에 의해 자행된 역사 왜곡이 분명하다.

 

그런 의혹이 드는 까닭은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워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공신 책봉을 보면 짐작을 할 수 있다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는 임진 전쟁이 끝난 이후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발표한다

 

호성공신(扈聖功臣)1604년 선조 37625, 전쟁 발발 10여 일 만에 도성을 버리고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들로 1, 2, 3등으로 구분해서 책봉했다.

 

또 선무공신(宣武功臣)1592년 임진 전쟁 당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거나 군량을 얻으러 간 사신과 후방에서 군사를 지원한 사람들로 호성공신과 마찬가지로 1, 2, 3등으로 구분해서 책봉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신 반열에 오른 사람 중에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빈 공신(18)보다 임금인 선조와 함께 도망간 공신(86)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

 

심지어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 전직 관료와 유생 그리고 승려와 노비 등 자발적으로 왜군과 맞선 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모두 버림을 받았다.

 

무능력했던 임금 선조는 양심도 없었는지 200만 명의 백성들이 죽은 참혹했던 전쟁을 왜란으로 축소하고 왜곡해서 자신의 무능을 숨기며 스스로 위안한 것...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무능하면 힘없는 백성들만 희생을 당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