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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계관방지도, 북벌 의지가 반영된 조선의 지도.

화별마 2023. 10. 11. 10:35

요계관방지도 이미지

요계관방지도, 북벌 의지가 반영된 조선의 지도.

 

1705년 조선 숙종 때 청나라 사신으로 건너간 이이명은 외교 활동 틈틈이 청나라에서 제작된 지도를 구입하려고 노력한다.

 

명나라 지도 주승필람(籌勝必覽)’을 구입한 그는 청나라의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를 구입하려고 애썼지만, 청나라에서 이 지도를 대외 유출 금지 도서목록에 올려놓아 수행한 화원을 시켜 이 지도를 베끼도록 한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자 자신이 입수한 지도를 숙종에게 올렸고, 숙종의 명으로 17061성경지와 조선의 서북강해변계도(西北江海邊界圖) 등을 참고해서 만주 지역과 조선의 서북 지역을 함께 그려 넣은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제작한다.

 

‘요계관방지도’에 관북 지방과 관서 지방만 그려 있는 것은 이 지도가 국방지도 성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도의 중국 부분은 동쪽의 흑룡강에서부터 서쪽의 산해관을 지나 남당아안(南塘雅安)에 이르며, 그 사이의 성책과 만리장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숙종 시대에는 청과의 영토 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1711(숙종 37) 청과 조선 국민 사이에 서로 국경을 침범했다며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 간 국경선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定界)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은 수차례 실랑이 끝에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하기로 합의한다.

 

당시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국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였던 만주와 백두산 일대를 성지로 만들기 위해 관리를 파견, 이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확정하려고 했다.

 

조선에서도 함경도 북방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영토 조사를 한 후 양국이 백두산의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워 영토 구분을 명문화한다.

 

당시 양측이 합의한 비문의 내용은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이었다.

 

그러나 이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19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 분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것이 백두산정계비 사건이다.

 

서쪽 경계를 압록강으로 정한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동쪽의 경계로 설정했던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던 것...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했지만, 조선은 만주 쑹화강 지류로 해석, 토문강을 쑹화강의 지류로 해석하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가 된다.

 

당시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토 분쟁에서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백두산 정계 이후 조선은 북방 지역의 주민 거주와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행정구역을 신설하는 등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한다.

 

이는 만주 지역까지 우리의 영토였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19세기 중엽부터 두만강 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간도 지역에 이주해서 토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국력이 약해지면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