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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왜 청 태종은 조기 귀국을 했을까?

화별마 2023. 9. 3. 12:20
병자호란 이미지

병자호란, 왜 청 태종은 조기 귀국을 했을까?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보다 강대국이었고 인조가 나와서 치욕적인 항복을 할 정도로 전쟁에서도 승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급하게 돌아갔을까?

청나라의 만문노당(滿文老檔)이라는 문헌을 보면 청이 조선을 어떤 방식으로 통치를 하려고 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수송에 이용할 큰길 주변의 조선인에게 헛되이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 그들은 모두 우리의 수에 포함될 조선인이니라.’

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조선 정복에 참전한 팔기군은 절과 능묘의 파괴, 항복한 성에 대한 약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해 등을 금지하고 항복한 자를 잘 보살펴주고 변발시킬 것을 명령받았다.

이를 보면 청 태종은 구체적인 구상은 아니지만, 조선을 통치하려는 막연한 의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청은 몽골 제국이나 화북을 장악한 요나라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장기전을 수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 점은 청나라의 전쟁 전략에서도 나타나는데, 점령과 왕조 멸망을 노린 침공이라면 이동로의 주요 성들을 모두 빼앗아 보급로를 확보한 후 장기전을 하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청은 장기전보다 빠른 왕의 항복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얻는 단기전을 선택했다.
 
만약 청 태종이 인조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 영토 확보나 왕의 폐위 등 대체 정권을 세웠다면 병자호란은 장기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청은 경제난으로 왕조의 존립마저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또 하나 청의 주된 병과는 팔기군이라고 불리는 기마병... 그런데 이 기마병은 넓은 평야에서는 큰 파괴력이 있지만, 조선이 잘하는 공성전에는 취약했다.
 
그래서 남한산성에서 공성전도 청이 기마병들을 동원해서 점령하지 못하고 산성의 전면을 포위,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것...
 
당시 청이 12만(최근 연구는 3만 명)의 병력이었지만, 만약 남한산성에 1년 치나 6개월 치 분량의 식량만 있었어도 청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추위에 지쳐 철수했을 기능성이 높다.

이는 청과 조선의 강화 조건 중 절대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북방 이민족이 중원으로 진출할 때면 항상 그 배후에 존재하는 위협을 미리 차단했다. 당시 청나라 역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후방인 한반도를 안정만 시키려 했던 것...

실제 병자호란이 발생 후 불과 8년 뒤인 1644년에 청이 북경에 입성한 것을 보면 조선의 멸망보다 중원으로 안정적 진출이 우선순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학설이 발표되었는데,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가 2016년에 발표한 학술 논문에서 언급한 내용이 그것이다.
 
논문에 의하면 청이 남한산성에서 조선과 대치하던 중 정축년 정월 16일과 17일 사이 청군 진영에서 갑자기 전쟁을 조기 종결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는 것...
 
그 이유를 청 태종실록에서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피두선귀(避痘先歸), 즉 청 태종이 천연두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는 내용이다.

천연두는 만리장성 이북 유목민 사회에 등장한 기록은 16세기로 이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공포가 심각했고 황제 청 태종도 전염될까 급히 귀국을 서둘렀던 것...
 
청 태종은 조선 정벌에 나선 청나라 군대가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했는데, 신이 도와야 하는 전쟁에서 천연두가 퍼졌다는 것은 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뜻으로 조기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