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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탄생, 중세의 몰락이 배경이었다.

화별마 2023. 7. 17. 09:34
명품 이미지

 

명품의 탄생, 중세의 몰락이 배경이었다.

 

흔히 중세 몰락의 원인을 3가지로 꼽는데, 신권의 몰락과 왕권의 몰락 그리고 인권의 신장이다.
 
중세가 되면서 서서히 신권이 관료화되어 어떤 때는 교황이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될 때도 있었다. 야누스는 이런 상황에 보면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지만, 기존 세력의 반발로 콘스탄틴에서 화형에 처해진다. 이후 그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신상이 세워지는데, 나신을 한 여신은 양팔에 2명의 꼬마 난쟁이를 들고 있다. 물론 꼬마 난장이는 교황을 의미했다.
 
야누스는 죽으면서, 지금 교황이 나를 죽이지만 100년에 후에 돌아와서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이 맞았는지 그가 죽은 지 100년 만에 마틴 루터가 등장한 것...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에 성공한 것은, 활자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일반 신도들이 신권의 부패와 그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 유럽에는 흑사병의 유행한다. 그 여파로 급격히 인구가 줄면서 일하는 인부들의 몸값이 굉장히 오른다. 이는 상대적으로 영주들의 권력과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인구 감소가 영주 중심의 봉건사회를 몰락하게 만든 것...
 
중세 초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성이나 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견고한 성이 완벽한 방어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대포에 의해 성도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귀족과 기사의 지위가 시민의 지위와 대등한 관계로 변화한다.
 
당시 귀부인과 평민의 구분은 피부색이 하나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산업화로 평민들이 공장이라는 실내에서 일하게 되면서 피부가 하얗게 되자 피부색으로 신분의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건강함을 상징하기 위하여 선텐을 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까맣게 탄 모습이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이 된 것... 이렇게 귀족들은 평민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루이뷔통 가방도 마찬가지... 루이뷔통은 원래 목수 아들이었는데, 그의 첫 직업은 귀족의 시종이었다. 마차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했다. 당시 기차는 귀족들의 여행 트렌드였는데,, 짐이 뒤섞이는 불편함이 생겨났다.
 
여행 가방의 구분과 편의성을 위해 네모난 박스의 가방이 등장한다. 이후 그는 가방회사에 취직, 나무로 만든 가방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 여행용 가방은 시종 없이 혼자 짐을 실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귀족들은 평민들의 여행 가방과 구분하기 위해 그에게 가방을 귀족이 외는 판매하지 말 것을 제안, 대신 가방을 모두 귀족들이 사겠다고 했다. 그는 흔쾌히 승낙하고 귀족만을 위한 가방을 만든다. 그러자 다른 상인들이 유사한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고 귀족들은 그 가방과는 더 차별화된 가방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한다.
 
그는 고민 끝에 가방에 일련번호 넣어 차별화를 시도했고, 자물쇠 장인과 합작, 누구도 함부로 열 수 없는 자물쇠가 달린 루이뷔통 가방을 출시한다.
 
주정뱅이 딸이었던 샤넬은 손재주가 있었다. 모자 가게에서 일하던 그녀는 유명한 연극배우가 그녀가 만든 모자를 사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 모자가 귀족들만 쓰는 명품이 된 것...
 
이후 그녀가 여성의 편리함을 도모한, 세계 최초의 여성 투피스 정장을 만들자 그때부터 귀족들은 사회활동에 편리한 재킷과 바지를 입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이렇게 중세의 몰락은 명품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